걸음마 뗀 한국 밸류업, 일본 선례에서 배울 점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도입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시장의 화두가 된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정작 상장사들의 참여는 활성화되지 못하는 분위기다. 현재까지 공시된 밸류업 계획의 내용도 대체로 단기적 주주환원에 편중돼있어, 중장기적 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담은 밸류업 계획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5월 24일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이 확정된 뒤 관련 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상장사는 총 12곳이다. KB금융지주와 키움증권이 지난 5월 27일 가장 먼저 밸류업 계획 관련 공시를 냈으며, 가장 최근 공시를 낸 곳은 지난달 31일 BNK금융지주였다.
다만 실질적으로 밸류업 계획을 밝힌 상장사는 신한지주·우리금융지주·메리츠금융지주·콜마홀딩스·에프앤가이드·키움증권 등 6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6곳은 모두 밸류업 계획을 연내 공시하겠다는 내용의 안내공시였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밸류업 계획에 상장사의 참여가 저조한 이유로는 불투명한 인센티브가 꼽힌다. 정부는 최근 세법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직전 3개년 평균치 대비 5% 이상 주주환원을 확대한 기업에 대해 초과분의 5%만큼 법인세를 세액공제하고 ▲해당 기업에 투자한 개인 주주에게는 배당소득세를 경감해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국회 의석 다수를 야당이 차지하고 있는 데다, 정부·여당과의 갈등이 심각한 만큼 세법개정안이 발표된 대로 국회를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상장사로서는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자본여력과 재무건전성을 고려하지 않고 주주환원 확대 계획을 공식화하기는 어렵다는 것.
발표된 밸류업 계획이 지나치게 단기적 주주환원 확대에 매몰돼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실제 6개 상장사는 대부분 약 3년간 주주환원율을 일정 비율 이상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밸류업 계획을 공시했다.
문제는 단기적인 자사주 소각 및 배당 확대가 장기적인 밸류업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일본의 자본시장 개혁 노력과 우리나라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한 시사점’ 보고서에서 한국과 일본 밸류업 계획의 차이점으로 “ 일본의 방안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배당, 자사주소각 등 주주환원 관련 지표가 핵심 지표 중 일부로 포함되었으며, 계획을 수립·이행하는 기업에 대해 세제 혜택 등을 부여한다는 점”을 꼽았다.
보고서는 “주가순자산비율(PBR)과 자기자본이익률(ROE) 수치가 주요 관심 대상이 되면서 기업과 투자자 모두 자사주의 매입 및 소각, 배당률 제고 등 단기적으로 PBR과 ROE를 높일 수 있는 주주환원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며 “자사주를 매입 · 소각하거나 배당을 늘리는 것은 ROE와 PBR을 높이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는 하나 과도한 배당이나 자사주매입은 기업의 투자 재원을 감소시켜 장기적으로 ROE와 PBR을 하락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 롤모델로 꼽히는 일본의 경우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중장기적 밸류업을 목표로 꾸준히 자본시장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가 해외 자금 유치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 2015년 거버넌스 코드, 2018년 투자자와 기업 간 대화 가이드라인 등을 차례로 도입했다.
도쿄증권거래소 또한 지난 2022년 주식시장을 재편하면서, 대형주 중심의 프라임 시장 상장사에 대해 독립사외이사 규정, 정보 공시, 주주관여 요건 등을 강화했다. 또한 “기업은 자본비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수익성과 자본효율성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는 거버넌스 코드 원칙에 따라 지난해 3월부터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실천 방안’을 시행하고 있다.
반면 국내 밸류업 계획 가이드라인의 경우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된 핵심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 상장사가 지배구조 개선 등 밸류업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고의적 허위공시가 아니라면 별다른 제재가 부과되지 않는다. 기업의 자율적·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라지만, 강제력이 떨어지는 밸류업 가이드라인은 계획의 실질적 이행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한 소액주주 보호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정부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일반주주를 포함시키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 추진이 필요하다고 밝혔지만, 법무부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관계 부처 입장이 엇갈리면서 보류된 바 있다.
반면,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 12월 자회사 상장 시 상장 사유, 모회사의 경영 관여, 소액주주 보호 관점에서 독립성 확보에 대한 방안을 공시하도록 하는 한편, 모회사도 자회사 소액주주와의 이해상충 위험과 이를 관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 등을 공시하도록 하는 등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한편, 보고서를 작성한 이보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의 자본시장 개혁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핵심축으로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이를 참고하여 기업지배구조 개선 노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라며 “기업이 투자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가치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주주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주주활동을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장기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임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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