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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상돈, 김광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다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5.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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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리아] 2025년 올해는 을사늑약 12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은 단순한 군사적 투쟁이 아닌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숭고한 애국정신의 발로였다.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누리는 자유는 숱한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실은 어떤가. 지난해에는 홍범도 장군 육사 흉상 철거 논란에 이어 건국절 논란과 독립기념관장의 뉴라이트 사관 논란까지 일찍이 볼 수 없없던 국론분열이 심했던 해였다. 하늘에 계신 순국선열들이 작금의 이 분열상을 보고 준엄하게 꾸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보훈부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1만 8천여명이고 현재 생존자는 5명뿐이다.독립운동가 중에는 안창호 이봉창 운봉길 유관순 열사 같은 유명 인사도 있지만 이슬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무명의 선열도 적지 않다.

<이코리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그 첫번째 순서로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선생과 부사장 서상돈 선생의 나라 사랑에 대해 알아봤다.

서상돈 선생 = 국가보훈처 누리집

서상돈 선생은 1850년 11월 10일 경북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가문은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었으며, 대대로 관직에 오르던 가문이었으나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문중에서 쫒겨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앙과 가산을 모두 잃은 서상돈 선생의 가족은 여러 차례 피난을 거듭하다가 1859년 대구에 정착했으며, 선생은 13세부터 상인의 심부름꾼으로 장사를 배우기 시작해 18세에 보부상을 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이후 그는 대구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확장했으며 35세 무렵에는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거상이 되었고, 경상도에서 토지를 매입해 대지주로 성장했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의 활동에 참여해 만민공동회 재무부장으로서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했으며, 근대 교육 발전을 위해 대구달서여학교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김광제 선생 = 국가보훈처 누리집

김광제 선생은 1866년 7월 1일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힌 뒤 23세인 1888년 종 9품 영회원 수봉관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1905년 동래경무관으로 재직 중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사직상소를 올려 친일파의 탄핵과 내정쇄신을 요구했다.

상소의 내용은 대한제국의 위기를 직시하고, 일본의 경제적·정치적 예속을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선생은 상소를 통해 "밖에서 오는 재난보다 가렴주구하는 신하와 탐학한 관리가 더 두렵다." 라고 강조하며 나라를 어지럽히고 도리를 해치는 무리들을 제거하고, 재야의 어진 인재를 등용하며, 교육과 법률 정비, 탐관오리의 척결을 통해 백성을 강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소를 올린 결과 고군산도에 유배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1906년 대구에서 서상돈 선생과 함께 광문사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비 =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 누리집

대한제국 시기 국권회복운동은 의병 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나누어전개되는데, 국채보상운동은 국민의 관심과 참여 열기가 높아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국채를 국민적 모금으로 갚기 위해 1907년 1월 29일부터 1908년 7월까지 전개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목적으로 구화폐를 환수하고 신화폐를 유통하였으며, 근대시설 개선과 철도부설 등의 명목으로 각종 차관을 도입하였다. 이렇게 도입된 차관은 1907년 1,300만 원에 달했으며, 이는 대한제국 1년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에서 김광제와 서상돈 선생이 국채보상운동을 공식 발의하며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서상돈 선생이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자”는 건의서를 낭독하자, 이를 기반으로 작성된 '국채보상취지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곧바로 대구 지역 상인층과 언론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운동 초기에는 대구금연상채회가 조직되어 북후정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금연과 헌금 운동을 통해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부녀자들은 패물을, 상인과 시민들은 현금을 기부하였으며, 심지어 걸인이나 백정까지도 참여하여 운동은 계층을 초월한 전 국민적 연대의 상징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민족 언론은 운동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채보상운동은 경제적 자립을 통해 일본의 재정적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통감부의 탄압과 내부 조직의 한계로 인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모금된 자금은 후일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에 사용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된 이후, 서상돈 선생은 실업 진흥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에 힘쓰며 사업 활동에 전념했으며 1913년 6월 30일,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한편 김광제 선생은 중국에 망명했다가 1919년 3·1운동 이후 귀국해 1920년 4월에 조선노동대회를 조직하여 노동자의 계몽과 권익 향상에 힘썼으며 전국 각지에서 강연을 통해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지역 청년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다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55세에 서거했다. 정부는 김광제 선생에게 1982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참고자료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광제 선생', '서상돈 선생' 항목

- 국가보훈부

 

 

 

 

현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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