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임순만 칼럼] 최고의 모임을 깨닫다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4. 9. 9.
728x90

 

지난 2일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침계(梣溪)’라는 서예 작품을 보았다. 세로 42.8, 가로 122.7cm의 작품에는 크고 굵은 두 글자가 화면을 꽉 채우고, 왼쪽에는 글씨를 쓰게 된 내력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대단한 글씨였다. 추사의 글씨를 소개하는 책에서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전문적으로 조명을 한 미술관 공간에서 실제 작품을 보자니까 가슴에 가득 들어오는 문자향(文子香)이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아무리 성능 좋은 앰프와 스피커를 여러 대 설치해 놓고 음반으로 들어도 음악회에서 연주 실황을 듣는 것에는 반의반도 이를 수 없다는 소리가 있다. 그런데 회화나 서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강원도 평창 가리왕산의 주목이 툭 꺾인 듯 힘찬 필치를 보자니까 저렇게 독창적이고 힘이 넘치는 작품은 세월의 어떤 풍화작용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침계. 사진=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침계’는 ‘물푸레나무 계곡’이라는 뜻으로, 젊은 시절부터 같은 정치적 계파에 속해 있던 문인 윤정현의 호라고 한다. 둘은 신라 진흥왕 순수비도 함께 연구하기도 했으며, 추사가 안동 김씨와 대립했던 권돈인의 배후로 지목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갔을 때 됐을 때 비슷한 시기에 윤정현도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 추사를 보살폈다고 한다. 추사는 오래전 윤정현에게 글씨를 하나 써주마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래된 비석에서 볼 수 있는 예서(隸書)로 글씨를 쓰려고 했다. 그러나 ‘침(梣)’자를 찾지 못해 오래 고심하다가 예서와 해서(楷書)를 혼합해서 써 30년 만에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추사가 쉽게 글자를 찾았더라면 판에 박힌 체본 대로 필치가 나왔겠지만, 오랜 세월 찾지 못해 고심하다가 마침내 60대 후반에 이르러 부러진 나무 기둥처럼 굵고 큼직한 획과 억센 필치를 얻었다는 설명문을 읽으니 사뭇 마음이 웅장해지는 바가 있었다. 삶이든 예술이든 힘찬 것이 으뜸이 아니겠는가.

대구간송미술관 전경사진. 사진=대구간송미술관.제공

 

대구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예술 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면적 8003㎥ 규모로 3층 건물에 6개 전시실과 수리복원실, 간송 아트숍, 강당 및 휴게시설, 도서 자료실과 박석마당(야외)을 갖췄다. 지난 2016년 대구시와 간송문화재단이 미술관 건립·운영에 대한 계약을 체결한 후 총사업비 446억 원을 들여 건립해 8년 만에 문을 열었다. 9월 2일 개관식을 갖고 본격 운영에 들어간 대구간송미술관은 이미 추석 연휴기간의 전시회 입장권이 매진됐다고 하다.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한 문화인이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 오세창의 도움으로 민족 유산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여 조선 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과 서예,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유산들을 방대하게 수집했다.

 

그는 1938년 성북동에 보화각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했다. 전형필의 가옥은 2012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됐다. 그동안 간송미술관은 수장한 국보급 문화재의 현대적 보존에 어려움을 겪다가 이번 대구간송미술관 건립으로 난제를 풀 수 있게 됐다.

 

대구간송미술관 개관 특별전 ‘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 함께 보배 삼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해 신윤복의 미인도와 월하정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국보와 보물급 지정문화유산 40건 97점과 간송 유품 26건 60점 등 모두 66건 157점이 전시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_용자본. 사진=대구간송미술관.제공

 

15세기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한글)의 원형에 대해 설명한 최고의 문헌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돼 서울로 가져온 지 84년 만에 처음 지역에서 전시되는 국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저술한 정음편과 집현전 학자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여덟 명의 신하들이 저술한 정음해례편으로 구성돼 있다.

 

정음편은 세종이 훈민정음의 창제목적을 밝힌 ‘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와 운용법을 설명한 ‘예의’로 구성돼 있다. 나라의 임금이 직접 새 글자를 창제하고 운용법을 설명한 경우는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로, 그만큼 세종대왕의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정음해례편은 각 글자의 원리와 체계를 밝힌 ‘해례’와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 등을 밝힌 정인지의 ‘서문’으로 구성돼 있다.  

 

1940년 일제는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라는 인류역사상 전무한 종족 개조정책을 강행했다. 민족문화의 최대 수난기였다. 간송 전형필은 그해 7월 중순 어느 날 오후에 인사동 한남서림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때 책 거간으로 유명한 한 인사가 모시 두루마기에 바람을 일으키며 분주히 지나가는 게 눈에 띄었다. 저 사람이 저리 바쁜 걸음을 치는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간송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오게 했다. 이야기를 들어본즉 지금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출현했는데, 그것을 구하기 위해 돈마련을 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돈 액수를 물으니 1천 원이라고 했다. 당시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간송은 아무 말 없이 1만 1천 원을 내주며 “1천원은 수고비요”라고 했다. 그렇게 들어온 ‘훈민정음’ 원본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영국 변호사 존 개스비는 동경에 살면서 수십년 동안 최고급 고려청자만을 수집해 그 수장이 당대 제일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일본에서 살던 서구인들은 필시 일본이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와도 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예견해 재산을 정리하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실제로 1941년 말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개스비도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수집한 고려청자를 인수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때 서른셋의 간송은 충남 공주 소재 5천석 지기 전답을 모두 처분해 개스비 컬렉션을 사들이는 과업을 이뤄냈다. 간송이 아니었다면 고려청자의 정수는 전부 일본인의 손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당시 고려청자를 사들이는데 든 돈은 서울의 번듯한 기와집 40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한다.

대팽고회. 사진=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추사의 글씨 ‘침계’ 옆에는 세로 129.5, 가로 31.9cm 크기로 ‘대팽고회(大烹高會)’ 두 작품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추사 특유의 곧은 가로획과 리듬감 있는 예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글자 하나하나의 운필(運筆)과 뜻이 관람자를 불러 세웠다. 

大烹豆腐瓜薑菜 (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 (고회부처아녀손)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글이다. 추사가 70세에 세상을 떠난 1856년에 쓴 글씨인데, 획은 기교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천진하게 내달리고, 뜻은 너무 편하고 담백해서 연신 ‘그렇도다!’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요즘 세상에 6성급 호텔에서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권세가들과 함께 나눈다고 한들, 그런 권력 추수(追隨)의 모임을 진정한 대팽고회(大烹高會 좋은 음식과 훌륭한 모임)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부부가 아들 딸 손자와 함께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을 함께 나누는 것이 가장 편안한 최고의 모임이다. 추사는 이미 2백여 년 전에 그렇게 삶의 진리를 서예로 썼다. 옛사람과의 빛나는 대화는 막힌 오늘의 길을 뚫는 힘이 있다. 

 

이번 추석에 모두 대팽고회의 좋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임순만 작가 · 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임순만 전 언론인

저작권자  이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 많은 기사는 '이코리아'(http://www.ekorea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