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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임순만 칼럼] 일본에게 양보하면 안되는 것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4.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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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도쿄에 국제전범재판소가 설치됐다. 재판에 회부된 전범은 28명이었다. 재판은 1946년 5월 3일에 시작돼 1948년 4월 16일에 끝났다. 11월 12일 피고 28명 중 1명은 정신이상, 2명은 자살하고 나머지 25명에 대해 판결이 내려졌다. 도조 히데키 등 7명이 교수형, 고이소 구니아키 등 16명이 종신형, 금고 20년 1명, 금고 7년이 1명이었다. 죄상은 침략전쟁의 죄, 잔학행위의 발령 수수 허가 고의 또는 부주의에 의한 방치의 태만 등이었다. 한국 침략과 학살 등 관련자는 제외되었다. 

 

전범들이 판결 직전에 쓴 글이 공개됐다. 교수형을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육군대장·관동군 제7방면군 사령관)는 “내 목숨을 아깝지 않은데,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고 썼다. 항복 후 일본의 신문들이 대부분 “군사적 패배와 민족의 문화적 가치는 별개”라며 “일본은 반드시 세계 각국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쓴 것과 유사한 흐름이었다. 군국주의에 대한 일본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의 그런 군국주의적 야욕은 독도를 자국령이라고 주장하는 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대의 역사를 차치하고, 근대 이후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한국은 독도를 분명한 한국령으로 관리해왔다. 1900년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켰다. 그때까지 일본은 독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라였다. 그 후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독도의 지정학적 가치에 눈독을 들였고, 이곳이 무주지라는 근거를 들어 무주지 선점을 주장하며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자국령으로 편입했다. 

 

일본은 이 고시를 1951년 9월 일본의 주권을 회복하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할 당시 독도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했다. 일본이 이렇게 난데없는 주장을 한 이유는 대한제국이 칙령 41호에서 독도의 경도 및 위도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항해 기술과 측량 기술이 뒤떨어지던 시절에는 자국에 어떤 섬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섬의 존재가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섬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되지 못했다. 이에 반해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에서 고시 제40호를 발령할 때에는 독도의 위도와 경도를 자세히 기록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독도의 불법 편입을 우리 정부에 통보하거나 그와 관련하여 우리 정부와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관보에 고시하지도 않았다. 패전 이후 일본 정부는 단 한 번도 대내외적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바 없었다.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의 대대적인 독도 조사사업과 1948년 주일 미군의 독도 폭격 사건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군의 독도 폭파사건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이용한 미국 공군 폭격대가 1948년과 1952년 두 차례 독도를 폭격한 사건이다. 

 

1948년 6월 8일 B-29 슈퍼포트리스 9대가 독도 근해에 4차례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실시했다. 이 때 독도 주변에는 동력선 30여 척이 조업 중이었다. 당시 신문은 어부 16명이 즉사한 것으로 보도했지만, 생존자들은 150명(배 한척에 5~8명으로 계산) 정도가 숨졌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사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으나 상세한 진상은 공개하지 않았다. 미군은 1952년 9월 15일에도 폭격 연습을 했다. 이때도 한국 어민 23명이 조업 중이었는데, 일본 시마네현 어민들에게만 경고를 내렸고, 한국 어민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당시 한국 외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폭격에 대해 항의했다. 훗날 이 사건은 한국이 독도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이 주일미군에게 폭격연습장으로 사용하도록 사주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약안 초안에서 독도를 ‘리앙쿠르암’이라 이름붙이고 한국령이라고 명시했다. 일본과 미국은 1947년부터 강화조약 초안을 만들기 시작해 1951년 8월 최종 초안이 완성되기까지 20여 차례 수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1947년 3월 19일자 강화조약 초안부터 1949년 11월 2일자까지는 독도를 한국 영토로 명기했으나 1949년 12월 8일자 초안부터는 일본 영토라고 명기했고, 1950년 8월 7일자 초안부터는 독도가 조약안에서 빠졌다. 결국 1951년 8월 13일 완성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최종 초안은 제2조 (a)항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했다. 조약 내용에 독도를 제외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은 제2조 (a)항이 일본에서 분리되는 모든 도서를 열거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한국의 도서가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명백하므로 독도는 반환된 도서에 포함되는 한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제2조 (a)항에는 독도가 빠져 있고,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으나 독도와 같이 강제 병합 이전에 일본에 편입된 영토를 한국에 양도한다는 내용은 조약에 없다는 점을 들어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기이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2005년 초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과 관련된 문서를 검토하던 중 영국 외무성이 완성한 대일평화조약 초안에 첨부된 지도를 발견했다. 지도는 한국, 일본, 대만의 영토를 표시하면서 독도를 한국 영토 안에 넣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당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한 지도였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일본에 보인 우호적인 태도는 고의든 아니었든 간에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 대립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정교수는 주일 미국 외교협력관인 윌리엄 시볼드 같은 로비스트들이 일본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발혔다. 그러나 당시 한국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가장 큰 당면과제였다.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기 위한 자료를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일본은 1952년 7월 26일 미국과 ‘군용시설과 구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독도를 미군의 공공훈련구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본 어민들이 폭격 당일 독도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폭격 전에 미군이 일본 어민들에게 독도에 가지 말라고 사전에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도발도 계속됐다. 일본은 1953년 5월 28일 독도를 침범했다. 오전 11시 무전을 장착한 수산시험선이 선원 30명을 태우고 독도에 나타나 그중 6명이 사진기와 쌍안경을 휴대하고 불법 상륙했다. 이들은 독도에서 어로 중이던 울릉도 북면 북암동의 김준혁(32)을 심문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 김준혁에게 일본 잡지 1권, 담배 3갑을 주고 어로상황을 체크한 뒤 오후 1시에 물러났다. 일본은 같은 해 6월 25일 2차 침범, 6월 27일 3차 침범을 도발했다. 6월 28일에는 4번째로 침범해 제작해 온 표목 및 게시판을 설치한 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이 “이 섬은 일본의 영토이니 차후에 본도에 침범해 작업하면 일본경찰이 인치하겠다”고 위협한 후 퇴거했다. 

 

7월 12일 5차 침범 때는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전날 울릉도 경찰서는 한국 어부들을 보호하고 독도에 침범하는 일본인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경찰관 3명으로 구성된 순찰반을 편성해 독도로 파견했다. 독도에는 어민 10명이 작업 중이었다. 12일 새벽 5시경 일본 선박이 도착했다. 경찰은 책임자인 일본 시마네현 해상보안청 캡틴을 만나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린 후 일인의 침범은 불법임을 지적하며 울릉서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책임자는 “한일회담에서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어느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독도는 맥아더라인 밖에 위치해 있고, 2차 대전 후에는 미군 폭격기 연습기지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일본 선박은 독도를 일주하며 일본 방면으로 도주했다. 한국 경찰이 정지를 명령했으나 불응하자 경기관총으로 위협 발포했으나 도주하는 일본 선박에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이때 일본 국회와 언론에서는 일본 외교가 유약하다며 해상경비대가 무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7년 평화헌법 9조는 “국권 발동으로서의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고 돼 있어 국제분쟁에서의 무력사용은 헌법상 금지된 상태였다. 그 이후 1953년 8~10월에는 일본의 독도 침범이 절정을 이뤘다.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조인된 ‘한일 양국 간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은 “양국 정부는 별도의 합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며, 이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 교환공문의 내용을 놓고 한국은 독도문제는 교환 공문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데 비해 일본은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양국 정부의 상반된 주장은 양국 국회에서 문제가 되었고, 국내에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양국 정부의 상반된 주장은 ‘독도 밀약설’의 배경이 되었다.

 

이동원 외무장관은 6월 24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제기되고 있던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독도문제는 앞으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의견을 교환하기로 한일 간에 합의했으나, 이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며, 제3국에 의한 중재에도 합의한 바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독도문제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으며, 발표된 이외의 비밀은 일절 없다고 강조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한일협정 조인 직전까지 진통을 겪을 만큼 한일 간 첨예한 비공식 현안이었다.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가 한일 간 분쟁지역이라는 사실을 한국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했고, 한국은 거부했다. 현재 일본은 분쟁지역인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독도는 고유 영토로 단 한 번도 분쟁대상지역이 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오고 있다.

 

이런 역사적 진행 과정에 비추어보면 독도문제는 추호도 일본에 유약하게 대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이 갖고 있는 군국주의적 속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 독도와 관련된 우리 정부의 자세가 애매하거나 미온적이라는 비판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적적한 계기에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임순만 작가 · 전 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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