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대해 ‘무제한 반려’를 예고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정부의 핵심 자본시장정책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역행하는 시도라는 시장의 비판을 의식한 조치로 풀이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두산로보틱스로부터) 정정신고서를 제출받았다”며 “최초 증권신고서 제출 시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구조개편의 효과, 의사결정 과정, 그로 인한 위험 등에 대해 주주들의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가 기재돼있는지 보겠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이어 “이러한 부분에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지속적으로 정정 요구를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이 “무제한 수정 요구”까지 언급하며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은, 이를 바라보는 시장의 여론이 크게 악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두산그룹은 지난달 11일 두산에너빌리티 자회사인 두산밥캣을 떼어내 두산로보틱스의 완전자회사로 흡수시키는 내용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계열사를 사업 성격에 따라 재배치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안은 발표되자마자 지배주주의 이익만 고려해 소액주주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지난해 매출 9.8조원, 영업이익 1.4조원의 핵심 계열사 두산밥캣과 2015년 설립 후 단 한 번도 흑자를 내본 적 없는 두산로보틱스를 시가총액으로만 평가해 1대 0.63이라는 주식교환비를 산정했기 때문. 우량기업인 두산밥캣의 주식 100주가 지난해 매출 530억원, 영업손실 191억원의 적자기업 두산로보틱스 주식 63주로 바뀌게 된 셈이다.
두산에너빌리티 주주 또한 핵심 계열사가 이탈하면서 주가가 하락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 지배구조 개편 발표 직전인 지난달 10일 2만1850 원이었던 두산에너빌리티 주가는 지난 8일 종가 기준 1만7540원까지 떨어진 상태다.
반면 두산그룹의 경우 이번 지배구조 개편이 완료되면 두산밥캣에 대한 간접지분이 기존 14%에서 42%로 늘어나게 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알짜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
문제는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안이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강력 추진 중인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지난달 12일 논평을 내고 “두산이 밸류업 기조에 얼음물을 끼얹었다”고 비판했다. 포럼 측은 “같은 지배주주가 사실상의 의사결정을 하는 계열회사 사이에서 지배주주에게 가장 유리한 시기와 시가를 기준으로 합병 또는 주식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일반주주들은 회사 성장에 따른 수익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이 반복되어왔다”라며 “진정한 밸류업은 바로 이런 거래를 근본적으로 막아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후 국내 증시 부양을 위해 공매도 전면 금지, 깜깜이 배당 개선, 쪼개기 상장 규제를 비롯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자본시장 정책을 추진해왔다. 올해 국내 증시의 최대 화두인 밸류업의 핵심은 다양한 인센티브를 통해 상장법인이 주주환원을 확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이 소액주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 여론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사태를 방치한다면 기존에 추진해온 자본시장정책의 설득력도 떨어지게 된다. 기존 정책과 엇박자 행보를 보이며 시장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면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에 대해 강도 높은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셈이다.
실제 이 원장은 8일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정부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배주주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기업경영 사례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어 안타깝다”라며 “이는 정부와 시장참여자들의 진정성 있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근절되어야 할 그릇된 관행”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이 언급한 “지배주주의 이익만 우선하는 경영 사례”는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 시도를 지목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 원장은 “주주의 권익보호 보다는 경영권 행사의 정당성만이 강조되어 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며 “이제는 기업들의 철저한 인식 전환을 위해 이사의 충실의무와 관련해 원칙 중심의 근원적 개선방안을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정부는 현재 ‘회사’로만 규정돼있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일반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을 검토 중이다.
두산 또한 지배구조 개편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악화되자 3개 계열사 대표명의로 주주서한을 보내는 등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논란의 핵심인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합병비율에 대해서는 현행법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 자본시장법은 계열사 간 합병 시 최근 주가를 기준으로 합병비율을 산정하도록 하고 있다. 스캇 박 두산밥캣 대표는 주주서한에서 “시장에서 회사의 가치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객관적인 지표는 주식시장의 시가”라며 합병비율 산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자본시장법은 계열사 간 합병 시 기준시가의 10%(비계열사는 30%)까지 합병가액의 할인·할증을 허용하고 있다. 두산로보틱스는 6일 제출한 정정 증권신고서에서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계열회사 간 주식교환의 경우 100분의 10의 범위에서 할인 또는 할증한 가액을 적용할 수 있으며, 두산로보틱스·두산밥캣이 각자 검토하고 상호 협상하여 합의된 바에 따라 할인율을 적용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원장은 “‘기업지배구조 선진화’는 개별 규정이나 법령 준수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와 규범, 즉, ‘문화’로 정착되어야 할 사안”이라며 “더 늦기 전에 자본시장 선진화에 필요한 사회적 공감대를 본격적으로 형성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임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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