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역사적으로 빛나는 독립운동가들이 많다. 독립운동가란 ‘통상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조선 왕후(명성황후)를 살해한 1895년 을미사변부터 1945년 8월 해방까지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맞서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독립기념관 정의)을 말한다.
헌신이란 그야말로 ‘몸을 바치는 것’이다.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자신의 삶을 바친 독립운동가는 3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지정한 사람은 2024년 3월 현재 18,018명이다.
나라의 독립에 헌신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특수한 일이다. 세계에는 많은 식민지의 역사가 있었고, 대부분 피식민 국가들은 잔혹한 취급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조선 지배는 세계사에서 가장 잔혹한 식민 통치를 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영국의 인도 통치가 잔혹했다고 하지만, 영국은 인도 자치를 허용했다. 일제처럼 조선의 자치를 완벽하게 봉쇄한 나라는 어디도 없다. 일제가 조선인 관리를 채용한 것은 일본 경찰을 보조하는 하급 경찰 관리뿐이었다.
조선에 이렇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성들의 고생이 그만큼 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부 지정 독립유공자 18,000여 명 중에서 여성 유공자는 660명에 불과하지만, 여성은 자식과 시부모를 부양하고 독립운동가 남편이 돌보지 않는 가정사를 책임지는 상황이었던 만큼 여성 독립유공자를 남아있는 기록과 서훈의 숫자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가 기억 해야 할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한다.
【이은숙 李恩淑 1889~1979】
이은숙은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부인이다. 우당 가문은 조선 중기 명재상 이항복의 자손으로 정승과 판서가 끊이지 않던 집안이었다. 단지 벼슬만 높다거나 재산만 많던 집안이 아니다. 학문도 높았고 수명도 대개 긴 편이었으니, 조선 최고의 명문가라는 소리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가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갔다.
당시 우당 6형제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중국으로 가져간 40만 원을 현재의 쌀값으로 환산하여 1천억이라고 하지만, 이는 상당히 저평가된 금액이다. 이회영이 살던 집은 서울 명동성당 건너편 YWCA와 은행연합회관 일대의 대지 1천 평에 가까운 대저택이었다. 그리고 인근에 집이 몇 채가 더 있었다고 하니 집값만 해도 수천억에 달하는 재산이었다. 둘째 이석영(李石榮)은 조선 최고의 부호로 소문난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의 양자가 되어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황현(黃玹)의 『매현야록(梅泉野錄)』은 이석영이 이유원의 집이 있던 가오실(남양주지 화도읍 가곡리)에서 한양에 올 때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고 전한다. 가오실에서 동대문까지 직선거리가 30km를 훨씬 넘으니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처분한 재산은 지금 돈으로 일이 천억 원에 그칠 수 없는 액수다. 이회영 6형제는 이 돈을 독립운동에 다 바쳤다.
이회영은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투사들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에는 만주까지 따라온 종들이나 그 자제들까지 입교시켰다. 지체 높은 6형제의 대가댁 마나님들이 그 뒷바라지를 다 맡았다. 영하 30도 만주 칼바람 속에서 밥해주고 빨래해 주고 바느질까지 다 해줬다. 한 사회가 망했을 때 그 사회에서 영광을 누리던 사람들이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를 무섭도록 치열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은숙은 그 많던 재산을 독립운동에 다 바친 뒤 생활이 어려워지자 국내를 6번 왕복하며 자금을 조달했다. 나중에는 서울에서 옷 바느질을 하며 돈을 모아 남편에게 보냈다. 이회영은 무장 독립투쟁을 무시하고 외교적 해결에 치중하는 이승만 상해 임시정부의 방략이 못마땅해 일제에 직접 맞서는 행동파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었다. 그는 대규모 거사를 앞두고 형 이석영을 찾아가 대련(大連 다롄)에 거점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말씀드렸는데,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대련에 도착한 즉시 일제 해상경찰에 검거돼 고문 끝에 1932년 옥사했다. 이석영의 차남 이규서는 아나키스트 백정기(白貞基)에 의해 암살됐다.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를 남겼다.
【정정화 鄭靖和 1900~1991】
정정화는 3·1운동이 일어난 후 친정아버지에게서 800원을 얻어 혼자 시아버지 김가진(金嘉鎭)과 남편 김의한(金毅漢)의 뒤를 따라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 도착해 무턱대고 조선 사람들이 사는 곳을 물어 찾아갔는데, 정정화의 이야기를 들은 손정도(孫貞道)가 시아버지와 남편이 사는 프랑스 조계 내 패륵로(貝勒路) 영경방(永慶坊) 10호의 골목에 있는 2층에 데려다주었다. 그후 정정화는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살림을 책임지고 요인들을 뒷바라지한 ‘임시정부의 안주인’이 되었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정정화가 지어 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상해에 도착한 정정화는 독립운동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생생하게 경험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가족들은 주먹밥과 한두 가지 반찬으로 때울 정도로 어려웠고, 누구나 값싼 천으로 만든 중국 장삼(長衫)을 걸치고 헝겊신을 신고 다녔다. 모두 이름과 명예와 긍지가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는 삶이었다. 여자들이 부엌에 들어가 불을 붙이고 물을 끓이고 나면 밥을 안칠 쌀이 없었다.
홀몸으로 중국에 건너왔듯이 정정화는 중국에 온 지 겨우 달포쯤 지난 후 홀로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러 국내로 잠입하겠다고 ‘당돌한’ 결정을 내렸다. 일제에서 작위까기 받았던 시아버지 동농(東農 김가진의 호)의 망명으로 일본 헌병들이 시댁을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는 가운데 서울엘 간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임정에서 정정화의 국내잠입을 찬성한 사람은 김구 한사람 뿐이었다. 6년근 인삼 판매상으로 위장해 서울로 온 정정화는 임정의 지시를 따라 여러 사람을 만난 끝에 상당한 돈을 구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백범이 정정화에 붙여준 별명은 ‘잔 다르크’였다. 정정화는 세 번째 잠입에서 일제에 붙잡혔다. 정정화는 친정아버지 상을 치른 후 다시 상하이로 가서 외아들 김자동을 낳았다. 그리고 도합 여섯 번이나 국내로 돌아와 자금을 모집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정이 옮겨 다닐 때 정정화는 이시영을 비롯해 혼자 망명 생활을 하는 네댓 독립지사들을 모시고 살면서 임정의 안살림을 본격적으로 맡았다. 정정화는 1940년 6월에는 한국독립당 여성 조직인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간사로 선출됐다. 정정하는 자서전 『장강일기』를 남겼다.
【오광심 吳光心 1910~1976】
오광심은 남만주에서 성장해 동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교사였다. 남편이 전근을 간 사이 동명학교 교장 김학규가 남경에 있는 임시정부로 가는 길에 합류해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김학규는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으로 ‘만주의 3대 영웅’으로 일컬어질 만큼 많은 전투를 치른 장군이었다. 그러나 만주가 일제에 먹힌 이후 만주 조선혁명군의 인력과 물적 자원이 고갈돼 임시정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남경에 파견됐다.
경흥, 환인, 집안의 삼각지대를 벗어나 남경까지 가려면 왜군의 경계와 감시를 어떻게 돌파하느냐가 문제였다. 왜군의 경계가 면밀한 만주를 통과하더라도 안동서 청도, 청도서 천진, 천진서 북경까지도 상당한 난관이었다. 이때 김학규와 오광심은 부부를 가장해 길을 떠났다가 부부가 되었다.
남경에 도착한 두 사람은 여러 독립운동단체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당시 남경에는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원봉의 조선의열단, 윤기섭·이청천·신익희 등이 영도하는 신한독립당, 김두봉의 한국독립당 등 여러 세력이 각축하고 있었다. 김학규 오광심 부부는 각 단체들의 개별 환영회에 참석하면서 자신들이 남경에 온 두 가지 목적인 조선혁명군에 대한 인적 지원과 만주의 물적 보급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인 만주 지원이 잘 이루어지려면 남경 각 진영의 통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만주에서 받은 사명은 남경 각 혁명세력의 통일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김학규는 남경의 사정을 본부에 알리기 위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200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이 보고서를 숨겨 산해관을 넘어가다가 일제에 적발되는 경우 본인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은 물론, 독립운동 단체들의 비밀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주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때 오광심이 보고서 내용을 전부 머리 속에 암기했다. 그리고 만주 본부에 도달하는 날까지 암기한 내용을 쉬지 않고 암송했다.
그녀는 만주 본부에 도착해서 남편의 보고내용을 친필로 글씨 하나 틀리지 않게 종이에 옮겨 적은 다음 남편을 대신해 자신의 친필로 서명하여 제출했다. 본부에서는 그 보고서를 보고 모두가 ‘역사적인 기록’이라고 환호했다. 장군의 부탁으로 책 한권 분량의 보고서를 완벽하게 머릿속에 담아와 전달하는 그녀의 열정에 모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김 장군이 보고서에 제안했던 통일안은 본부의 비준을 받아 부부는 다음 해 봄부터 남경의 통일회의에 정식으로 참가했다.
오광심은 남경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임시정부는 1939년 2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했다. 이 단체에 속한 대원 34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11명이 여성들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오광심이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오광심은 광복군 창립식에 참석했고 총사령부의 사무 및 선전사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1941년 2월부터는 지복영, 조순옥 등 여성대원들과 함께 한국광복군 기관지인 <광복>의 원고 작성과 편집을 담당했다.
【신정숙 申貞淑 1910~1997】
신정숙은 한국광복군 1호 여성 대원이다. 남편을 찾으러 나섰다가 최초로 여성 한국광복군이 되었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본명은 신봉빈(申鳳彬)으로, 스무살 때 남편 장현근(張鉉瑾)과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후 애국청년단 소속으로 조선과 중국을 오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에 연루돼 송환돼 투옥되었다. 남편은 출옥 후 중국으로 다시 망명한 후 소식이 끊어졌다. 신봉빈은 남편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8년 하순 일본군이 남경을 함락하고 무한(武漢 우한)까지 진격해 들어올 때 중국군사위원회 소속으로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의용대 본부는 적극적인 초모(招募 지원병모집)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 중국국민당 군의 상덕(商德 창더)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수백명의 일본군 포로들 중에 신문 결과 31명이 한국인임이 밝혀졌다. 중국국민당은 조선의용대에서 이들을 인계할 수 있는지 타진했고, 조선의용대는 이들을 받아들여 대원으로 입대시켰다.
이중에 8명의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신봉빈이었다. 남편을 찾아 중국에 왔다가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것이다. 그녀는 포로조사관에게 어떻게 하든지 김구와 연락을 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구 선생이 알기만 하면 필연코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을 정도로 김구는 중국 내 한인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일본인들의 간섭을 거부하고 유창한 일본어로 항쟁하는 신봉빈을 본 중국 관리들이 김구와의 연락을 주선해줬다.
김구가 중국국민당 위원장 장개석(蔣介石 장제스)에게 청구해 신봉빈을 찾았을 때 그녀는 김원봉 산하의 조선의용대원이 돼 있었다. 이에 김구는 김원봉에게 “신정숙이 내 부하의 아내이고, 본인이 임정으로 오기를 희망하니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 중경으로 데려왔다. 신정숙이라는 이름은 이때 김구가 지어준 것이다.
신정숙은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분처 징모위원 임명식에 참여해 한국광복군 1호 여성대원이 되어 여성 군번 1번을 받았다. 4월 29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김문호, 이지일, 한도명과 함께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사령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받아 이를 수행했다. 이후 광복이 되기까지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헌신하였다.
광복 후 1946년 3월에 부산항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온 신정숙은 아들과 함께 백범이 사는 경교장에서 머무르며 비서로 생활했고, 김구가 서거한 후 생계를 꾸리기 힘겨워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63년 독립유공자 연금제도가 생겼을 때, 그녀는 연금 수령을 거부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의 특별심사위에서 독립유공자 심사를 했는데, 독립운동과 무관한 자들을 유공자로 둔갑시키는 역사 왜곡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진정서를 제출한 덕분에 1977년이 되어서야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화림 李華林 1905~1999】
이화림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조선의용대가 되어 화북지방으로 넘어간 독립운동가다. 평양 출신 이화림은 1930년 상해로 가 한글학자인 김두봉의 소개로 김구를 만났다. 다음 해 김구가 창단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화림은 이봉창 윤봉길과 함께 한인애국단의 핵심 요원이 되었다. 김구와 이봉창과 이화림은 이봉창이 일왕 암살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 수류탄 2개를 숨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이봉창의 팬티(훈도시) 허벅지 안쪽 부위에 수류탄을 넣을 수 있도록 비밀 주머니를 만들어 준 것도 이화림이다.
몇 달 후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때는 윤봉길과 이화림이 부부로 위장하고 홍구공원을 답사했다. 윤봉길은 홍구공원에서 봄부터 채소 장사를 하며 철저한 준비를 했다. 윤봉길은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기에 일본사람들조차 조선인인 줄 몰랐다. 그러나 거사 직전 김구는 생각을 바꿨다. 윤봉길은 일본어에 능숙했지만, 이화림은 일본어를 잘 몰랐다. 부부로 위장하다가 오히려 검문에 걸려 둘 다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윤봉길은 스프링코트 차림으로 홍구공원으로 가 도시락폭탄과 물병폭탄을 휴대한 채 기념식장에 무사히 들어갔다. 이화림은 그 모습을 100m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다. 윤봉길이 무사히 식장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이화림은 맞은편 골목길로 사라졌다.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백범과 임정 요인들은 상해를 떠나 가흥 방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이화림은 혁명을 꿈꾸는 젊은 청년들이 운집한 광주로 갔다. 이화림은 민혁당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윤세주(尹世胄)의 연설을 듣고 테러로는 제국주의 일본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해 민혁당에 가입했다.
1939년 김구의 모친 곽낙원이 세상을 떴다. 이화림이 빈소를 찾아왔다. “동해(이화림의 호)야, 너 아직도 공산주의자냐? 공산주의를 믿느냐?” 김구가 물었다. “저는 공산주의자를 믿습니다.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 이화림이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구와 이화림은 그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화림은 1941년 화북으로 들어갔다. 조선의용대에서 무장 선전활동을 전개한 이화림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구호 선전과 삐라 살포 등 무장 선전에 항상 앞장섰다.
이화림은 여자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대범했다. 대다수 조선의용대 여자들이 남편을 따라 화북으로 간 데 비해 후방이 아닌 전방에서 싸우겠다는 의지로 홀로 화북행을 한데서도 알 수 있듯 이화림은 용맹했다. 작전이 시작되면 남자 이상으로 대담하게 싸웠다. 이화림은 화북조선독립동맹 주석 김두봉의 휘하에서 자료 수집 간사로 활동했다. 1936년엔 민혁당에 가입해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부녀대의 부대장을 맡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제6군단 소속으로 참전했고, 위생소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이화림은 중국으로 건너가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 분자로 몰려 박해를 받았다. 이화림은 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인민군으로서 6·25에 참전한 경력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임순만 작가 · 전 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임순만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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