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전략산업을 기르고 기술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글로벌 경쟁에서 한국 정부만 느슨한 모습이다. 미국, 일본, 중국, 유럽연합(EU)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국가가 나서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의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한 푼도 지원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14일 정부·관련 기관에 따르면 올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산업통상자원부 대상 국정감사에서 정부의 인색한 반도체 보조금 정책에 대한 질타가 나왔다.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7일 국감에서 "미국은 2022년 제정된 반도체법에 따라 연방정부 차원에서 4개의 펀드를 설치해 지원하고, 일본도 별도의 반도체 지정 펀드로 보조금을 지원한다"며 "우리나라에는 반도체 특별회계가 없어 일반 예산에서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 의원은 "반도체 관련 예산을 일반 회계로 편성해 집행하면 기재부가 반도체 지원을 좌지우지할 여지가 크다"며 "상황에 따라 어느 해에는 반도체 지원이 덜 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여당이 8월 '반도체 직접 보조금 지원' 규정이 포함돼 있는 반도체특별법안을 당론으로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산업부가 미온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이에 대해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상대국이 어떻게 하는지 계속 모니터링하며 경쟁 요건이 불리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대규모 기반시설과 넘볼 수 없는 기술의 개발이 필요한 첨단산업에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투자는 필수다. 주요국의 반도체 산업정책 공통점은 정부개입으로 경제성장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특히 보조금 정책이 주로 활용되고 있는데 이는 선점효과와 승자독식 양상을 보이는 첨단산업에서 가격경쟁력과 기술력 확보에는 보조금 정책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미국·중국·일본은 경제안보 차원에서 반도체 지원을 강화 중이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2022년 칩스법 서명식에서 미국의 국가안보는 반도체 산업에 달려있다고 하며, 같은 해 10월 반도체 수출통제 개정 조치로 대중 반도체 수출통제를 강화했다. 이와 함께 아시아 국가에 의존하던 반도체 생산을 자국에서 해결하기 위해 인텔에 85억 달러 보조금 투입 계획도 발표했다.
중국은 반도체 수급의 높은 대외의존도를 약점으로 인식하며, 중국 반도체산업발전추진요강(’14년) 및 제14차 5개년(’21~’25) 계획에 따라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높이기 위해 2023년부터는 반도체 대표 기업 SMIC에 2억7000만 달러의 보조금 지급을 시작했다. 이에 더해 정부가 대주주(지분비율 30% 이상)로서 정부 주도의 투자주 및 연구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SMIC는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97% 감소했으나, 설비투자 지출액은 77% 증가했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재부흥을 목적으로 키옥시아·NTT 등 8개 연합 반도체 기업인 라피더스 설립에 63억 달러가 넘는 보조금을 이미 투입했고, 최근 일본 경제산업성은 추가 지원방안까지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리나라 정부의 지원은 낮은 금리의 대출과 세금과 관련한 혜택이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경제안보 컨트롤 타워 통한 정책 및 관련법의 교통정리가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 정책과 관련해 국가와 에너지 안보, 산업 경쟁력, 재생에너지 개발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포괄적인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산하 국가전략기술특별위원회가 올해 2월 출범했다. 하지만 부처별로 다른 법률과 기준(과기부 국가전략기술·기재부 국가전략기술간 지원산업 및 지원내용 상이)에 대해 정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2021년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 단일 조직에서 산업과 안보 정책을 추진 중이다. 중국은 총리 산하였던 과학기술부를 작년에 국가주석이 관할하는 당 중앙위원회(중앙과학기술위원회)로 격상함으로써 지도부가 직접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한다.
일본 또한 중국의 희토류 수출제한 이후 경제안보 역량을 지속해서 강화해 왔다. 2021년 장관급 조직인 경제안보담당관실을 설치하여 총리 주도의 범부처 통합 대응체계를 구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경협 관계자는 "한국은 기업 대상 세액공제와 같은 간접적인 지원에 집중 중인데, 주요국 산업정책 동향과 금년도 세부 부족 상황을 고려하여 생산 기반의 국내 유치와 연구개발 등을 위해 미국이 시행 중인 직접환급(Direct Pay) 제도와 같은 정책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직접환급 제도는 기업이 납부할 세금보다 공제액이 더 크거나 납부할 세금 자체가 없는(적자) 경우, 그 차액 또는 공제액 전체를 현금으로 지원해 즉각적인 기업 현금 유동성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한경협은 또 정부의 재정건전성 유지 필요성에 공감하나, 첨단산업에 대한 보조금 등 정부 지원은 소비지출로 인한 부채 증가와 달리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이며 이는 국민경제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을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정책과 관련해 일관된 정책 프레임워크 내에서 재생에너지 발전 및 저장 기술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 에너지경제·재무분석 연구소(IEEFA)는 지난 8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첨단산업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2050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정책 프레임워크 내에서 재생에너지 발전 및 저장 기술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2023년 한국의 재생에너지 비중은 전체 발전량에서 9.64%에 불과해 세계 평균(30.25%),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OECD, 33.49%), 아시아 평균(26.73%)에 비해 훨씬 뒤처져 있다.
일부 글로벌 고객사들이 이미 RE100(전력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을 달성하거나 높은 수준의 이행률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 기업들은 재생에너지 전력이 부족해 여전히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보고서는 한국이 재생에너지 보급을 가속화하기 위해 여러 법과 정책을 제정했지만, 통합된 접근 방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국가 및 에너지 안보, 산업 경쟁력, 재생에너지 개발을 총체적으로 통합하는 종합적인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고서 저자이자 IEEFA 한국 에너지 금융 전문가인 미셸 김 연구원은 "한국은 지정학적 영향력, 국가 안보, 산업 리더십, 금융 접근성, 공공 복지를 지키기 위해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해야 한다"면서 "재생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한국은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수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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