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사태와 관련해 제재 절차에 착수한 가운데, 해당 상품을 판매한 시중은행들이 자율배상에 나서고 있다. 조 단위의 과징금과 최고경영자(CEO) 징계 등 중징계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선제적인 피해구제 노력으로 제재가 얼마나 경감될 수 있을지 눈길이 쏠리고 있다.
앞서 KB국민은행은 지난달 29일 이사회를 열고 홍콩 ELS 손실사태와 관련해 금융감독원의 분쟁조정기준안을 수용하고 투자자에 대한 자율배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KB국민은행은 홍콩 ELS를 가장 많이 판매한 은행으로 판매잔액만 8조원이 넘는다.
은행권 전체 판매잔액의 절반을 차지하는 국민은행이 자율배상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홍콩 ELS를 판매한 주요 시중은행은 모두 자율배상에 동참하게 됐다. 신한은행도 같은 날 이사회에서 자율배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으며, NH농협·SC제일은행(28일), 하나은행(27일), 우리은행(22일)도 이미 이사회에서 같은 결정을 내린 상태다.
특히, 하나은행의 경우 지난달 29일 은행권 최초로 일부 투자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홍콩 H지수 ELS 투자 손실이 확정되고 사실관계가 확인된 투자자들과의 배상비율에 대한 원만한 합의가 이뤄진 결과”라며 “손실이 확정된 투자자들의 배상비율을 조속히 확정하고 개별 합의를 거쳐 신속히 배상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은행들이 모두 자율배상을 추진하기로 하면서 금융당국의 제재 수위가 어떻게 정해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이번 주 내 홍콩 ELS 손실사태와 관련해 불완전판매 등 위법행위가 적발된 판매사에 대한 검사의견서를 발송하고 공식적인 제재 절차에 돌입할 계획이다.
앞서 금감원은 지난 11일 홍콩 ELS 손실 사태 검사 결과를 발표하며 “금소법 등 소비자보호규제 및 절차가 대폭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소비자보호장치들이 실제 판매과정에서는 그 취지에 맞게 충실히 작동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판매 은행들이 ELS 판매를 확대하도록 성과지표를 설계해 불완전판매를 조장하는 한편, 금융소비자 보호에는 소홀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안정적 성향의 투자자에게 투자성향을 상향하도록 유도하거나, 청력이 약한 고령투자자에게 상품내용을 ’이해했다‘라고 답하도록 고객의 투자성향을 왜곡하거나, 영업점 방문이 어려운 투자자를 대신해 투자성향진단설문지, 상품가입신청서 등을 대리 작성·서명하는 사례도 적발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시중은행의 불완전판매 정황이 금감원 조사 결과 드러난 만큼, 조 단위의 과징금과 CEO 징계 등 중징계가 처분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2021년부터 시행된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금융상품 판매 시 설명의무를 위반하거나 부당권유 및 허위·과장광고를 한 경우 판매금액의 최대 5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금소법 시행 후 판매된 홍콩 ELS는 총 17.1조원 수준으로, 해당 물량이 모두 주요 판매원칙을 위반했다면 판매 은행들은 그 절반인 8.5조원의 과징금을 납부해야 한다. 물론 전체 물량이 불완전판매에 해당하지는 않는 데다 과징금 감경 기준이 있는 만큼 실제 과징금은 이보다 적겠지만 각 은행이 부담해야 할 액수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CEO 징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금감원은 해외금리연계형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 라임·옵티머스 펀드 환매중단 사태 등과 관련해 다수의 판매사 CEO에게 금융권 취업이 제한되는 수준의 중징계를 처분한 바 있다.
선제적 배상에 따른 배임 가능성을 우려하던 시중은행들이 금감원의 배상기준안 발표 후 일제히 자율배상에 나선 것 또한 징계를 고려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달 11일 “판매사의 고객피해 배상 등 사후 수습 노력은 관련 법규 및 절차에 따라 과징금 등 제재 수준 결정 시 참작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미 여러 차례 고위험 상품 불완전판매로 곤욕을 치러온 은행권으로서는 금감원장의 이러한 발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금융당국이 중징계 방침을 세우더라도 CEO 징계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나온다. 이미 금융사고와 관련해 제재를 받았던 CEO들이 징계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 실제 손태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경우 지난 2022년 DLF 관련 징계취소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지배구조법상 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는 CEO에 대한 징계 근거가 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 또한 지난 2월 DLF 징계취소소송에서 1심 판결을 뒤엎고 승소했으며, 박정림 전 KB증권 대표, 정영채 전 NH투자증권 대표 등도 라임·옵티머스 관련 징계를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금융당국으로서도 법적인 검토 없이 CEO 징계를 다시 밀어붙이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한편, 금감원 관계자는 “내부통제 부실 관련 제재 여부는 관련 법령과 법원 판결, 그동안 정립된 제재기준 등을 감안하여 관련 절차에 따라 처리할 예정”이라며 “검사결과를 조속히 정리해 제재절차를 신속하게 개시할 계획이며, 구체적인 제재범위 및 수준은 관련 법규와 절차에 따라 추후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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