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 상해시에 보존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황포구(黃浦區)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306호의 허름한 건물 하나뿐이다. 1919년 4월 11일 프랑스 조계 내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임정이 처음 들어섰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제에 쫓겨 여러 번 옮겨 다닌 끝에 1926년 3월부터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1932년 4월까지 6년간 사용했던 보경리 청사가 하나 보존돼 있다.
지난 4월 18일 소통과혁신연구소에서 주관한 ‘대한민국임시정부 105주년기념 독립운동역사기행’에 참여한 탐방단이 보경리 청사를 방문했을 때 단원들은 모두 탄식을 삼켜야 했다. 세계 경제 대국 10위권이라고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근본과 법통을 만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참혹할 만큼 초라한 몰골로 상해 어느 뒷골목에 버려진 듯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평소 ‘나라사랑’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버거웠던 범인의 입장일망정 흘러나오는 한탄을 멈출 수 없었다. 이나마도 현 정부 들어서는 말라비틀어져 가는 한중 관계로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하니, 오랜만에 들른 고향 집 앞마당의 신선했던 우물이 폐정이 돼버린 것을 보듯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한중 수교 이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건물을 찾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한 끝에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상해시와 공동조사를 진행해 현재의 마당로 건물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용했던 건물로 확인했다고 한다. 1993년 일제 강점기 활동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해 상해시 ‘황포구 문물 보호단위 제174호’로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의 협조 아래 보존 관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현실은 눈물겹다. 보경리 4호 길가의 벽에 작은 표지판이 하나 붙어있을 뿐 눈에 띄는 별다른 표식이 없어 찾기도 쉽지 않다. 그 담벽 끝에 붙어있는 철 대문을 밀치면 작은 골목이 나오고, 그 골목에 협소하게 늘어선 ‘농당(弄當)’이라고 하는 형식의 건물 세 번째 현관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바로 이웃에 있는 음식점이나 의류매장에도 못 미치는 규모는 원래가 그렇게 협소했던 것인 만큼 그렇다 치더라도, 보존 중인 역사적 전시물도 제대로 된 것이 없고, A4 용지에도 못 미치는 크기에 건성건성 만든 팸플릿 하나가 고작인 설명문을 받아 들 때는 이 고단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외관이 이런 만큼 내부는 더욱 눈물겹다. 안으로 들어가면 임시정부 요인들이 생활했던 공간을 복원해 놓고 있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이 있고, 회의실은 회의용 탁자,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임시정부 초기 사용했던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다. 주방은 당시 사용했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 하지만 테이블과 의자가 전부다. 2층에는 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침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가 복원돼 있다. 3층에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몇몇 자료를 보여주는 옹색한 전시실이 있다.
이것이 전부다. 마지못해 구해놓은 듯한 낡은 집기 몇 개가 우리나라의 근본과 법통을 만든 대한민국임시정부 복원이라고 한다. 이것이 우리 정부의 선린(善隣)에 기초한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임정의 홀대인지, 아니면 오랜 중화 사대(事大)를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중국 혐오인지, 무엇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 나라 법통에 대한 은근한 외면은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후세대의 염치의 문제이자, 최소한 역사와 자존에 대한 우리 내부의 천박한 인식의 문제인 것만 같아 진강으로, 항주로, 가흥으로 임시정부를 찾아다니는 동안 내내 마음 아팠다.
지금 우리나라의 어느 박물관을 가더라도 홀로그램을 활용한 눈부신 인터랙티브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하기에 바쁘다. 아니 첨단 인테리어의 발전 덕분에 전시되는 콘텐츠들은 하나같이 눈부신 창의력을 자극하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의 문자가 교교한 달빛에 실려 이순신 장군의 장검 위에서 번쩍거리는 식이다. 이런 세상에 저녁 밥을 굶은 김구가 ‘백범일지’를 쓰던 저 기억의 공간을, 새로운 독립운동을 기대하며 돈을 보내겠다고 약속하는 수많은 미국 동포들이 편지를 띄우던 꿈의 시절을 이토록 홀대하고도 마음 편한 이 나라의 고관들은 대체 뭐 하는 작자들인가.
1932년 4월 29일 열린 일본군의 상해점령 기념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행사에서 수류탄을 던지기까지 윤봉길은 홍구공원에서 손수레에 야채를 실은 행상을 가장해 수십 수백번의 투척 연습을 통해 명중시킬 수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 청년에게 수류탄을 건네주고 아픈 마음을 가눌 길 없던 백범 김구는 지금까지 입었던 누더기 중국옷을 벗어버리고 신사복 한 벌을 사 입었다. 잃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지사들은 각각의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해야 했는지, 꿈결 같은 메아리가 들려오는 현장이 아니겠는가.
독립운동 시대에는 많은 방략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력투쟁론과 외교교섭론이다. 딱히 무엇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교훈은 독자적으로 자신을 지킬 무력을 갖추지 못한 민족에게 외교교섭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미국을 활동무대로 삼아 평생 외교청원론을 주장했지만, 미국을 포함한 국제무대에서는 그의 청원에 귀 기울여준 적이 없다. 고작해야 미 국무부에서 그의 서류를 접수한 후 되돌려주는 수준에서 끝났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중국의 장개석 송미령 부부가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적 합의를 끌어낸 것도 김구를 포함한 임정세력의 목숨 건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지 외교문서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카이로선언의 한국 관련 조항에서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이 독립할 것‘이라는 합의가 나왔을 때, 이 조항이 얼마나 중차대한 문제를 지닌 것인지를 가장 먼저 파악한 사람이 영어 달변자들인 외교투쟁론자들이 아니라 무력투쟁론자인 김구라는 사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라의 독립은 말이 아니라 실천과 자기희생을 감당하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다는 명백한 방증이다.
정부는 과거도 미래도 없는 몰지각한 역사 망령의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의 역사는 힘들고 비루하면 힘들고 비루할수록 정신이 살아있었고, 자신을 버리고 여럿의 이익을 추구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의 독립운동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목숨을 바쳐 민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투쟁함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세계를 각성케 한 힘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하다. 이제라도 상해를 시작으로 중경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투쟁의 역사를 제대로 발굴하고 알차게 전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지키는 길이자, 세계 무대로 향하는 첫 발자국이다.
국내외 역사문화기행을 60회 넘게 기획한 소통과혁신연구소 정성희 소장은 “미국의 대중국정책과 그로 인한 한중관계 악화, 근현대사에까지 중화역사를 확장하고자 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영향으로 우리 임시정부는 날이갈수록 허술하게 취급·보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 소장은 오는 10월 광주에서 중경에 이르는 제2차 ‘대한민국임시정부 105주년기념 독립운동역사기행’을 통해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보존 실태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30년 이상 지구촌에서 크게 지평을 넓혔던 한국문화의 붐이 근년 들어 시나브로 수그러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빛내고 보존하지 못한 후과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나는 요즘이다.
임순만 작가 · 전 언론인(국민일보 전 편집인)
임순만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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