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정부가 네이버에 라인의 지분 매각을 압박하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라인은 네이버가 지난 2011년 일본에서 출시한 메신저로 현재 일본에서 9천 6백만명에 달하는 이용자를 확보한 ‘국민 메신저’로 정착한 애플리케이션이다. 지난 11월 일본에서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라인’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뒤 일본 정부는 두 차례에 걸처 행정지도를 내렸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일본 소프트뱅크에 '네이버와 자본 관계 재검토'를 요구한 것이다. 현재 라인을 운영하는 라인야후의 모회사 A홀딩스의 지분은 네이버와 소프트뱅크가 각각 절반씩 보유하고 있다.
만약 네이버가 일본 정부의 요청에 지분을 매각할 경우 일본의 라인 운영권 뿐만 아니라 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에서 2억 명이 사용하는 라인 서비스의 경영권이 소프트뱅크로 통째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네이버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네이버와 라인야후의 시스템 분리를 진행 중이며, 일본 거주자의 개인정보는 일본에 위치한 서버에 보관하도록 개인정보 취급정책을 개정하는 등 각종 조치를 취하고 있다. 또 최수연 네이버 대표는 3일 열린 컨퍼런스콜에서 “일본의 행정지도에 따를지 말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닌, 중장기적인 사업 전략에 기반해서 결정할 문제로 내부적으로 검토를 진행중이다.”라고 이번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최근 한일관계 개선과 한미일 협력을 외교적 성과로 강조해온 정부는 현재 일본 정부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기보다, 네이버의 입장을 존중해 이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30일 외교부는 이번 상황과 관련해 네이버 측과 협의하고 있으며, 네이버의 요청을 전적으로 존중하며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과기정통부 역시 현재 주무부처로서 네이버와 소통하고 있으며, 정부가 할 수 있는 사항을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이라는 입장만 밝힌 상황이다.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이번 사태에 대해 우려하며 정부의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플랫폼이 외국 기업이어서 자국민의 개인정보 데이터가 타국으로 넘어간다고 생각하고 모든 플랫폼의 경영권을 자국 기업이 가져가야 한다면, 어느 해외 기업이 그 나라에 투자할 수 있겠는가.”라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3일 브리핑을 통해 “일본 정부가 라인 강탈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는데, 윤석열 정부는 손을 놓고 일본의 눈치만 보고 있다.”라며 “네이버는 이미 일본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소프트뱅크와 라인 지분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는데, 이는 적대국에나 할 행태”라고 비판했다. 또 데이터 패권 경쟁 시대에 윤정부가 라인을 일본에 내준다면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조국혁신당은 “일본 정부가 라인을 삼키려고 하는데 한국 정부와 윤석열 대통령은 한 마디 항의도 못한다.”라고 비판했으며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정부는 우리 기업을 지키는 방향으로 최대한의 외교적 노력을 보여달라.”라고 요청하는 등 정치권에서 잇따라 정부의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IT 시민단체에서도 이번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7일 ‘공정과 정의를 위한 IT시민연대 준비위원회’는 현 사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준비위는 “우리는 이번 사태가 라인을 완전히 탈취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 아닌지 의심한다. 일본 정부와 자민당의 라인과 네이버 때리기가 혹시 소프트뱅크라는 일본기업의 라인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다.”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로 모처럼 형성된 한일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준비위는 만약 네이버가 이번 사태를 통해 라인을 뺏기게 되면 네이버가 지금까지 쌓아온 해외 진출 역량과 기반을 송두리 채 뽑혀 원점에서 시작하게 될 수 있다고 우려하며 네이버가 이번 사태 대응에 실패하고 소프트뱅크에 백기투항한다면 향후 두고두고 네이버는 ‘친일기업’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네이버의 대응 역시 촉구했다.
또 준비위는 지금 외교부와 과기부가 네이버의 입만을 바라보면서 수수방관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정부와 국회는 이번 라인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제2의 독도 사태’로 비화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지금이라도 국회와 정부, 그리고 민간의 전문가들을 포함한 국가적 TF를 구성해 일본 정부의 부당한 압박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본의 이런 움직임을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확산중인 데이터 보호주의와 연관짓는 의견도 있다. 세계 각국이 AI 산업 육성에 주목하게 되면서 AI 산업의 주 재료인 데이터 보호를 위해 자국의 데이터가 해외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장벽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소수의 국가와 기업이 AI를 독점하는 상황에 맞서 비영어권 국가가 자국의 언어, 문화를 학습시켜 자국의 환경에 맞는 AI 모델을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소버린 AI' 전략을 채택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것 역시 이런 데이터 보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김덕진 IT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에 일본 스스로의 데이터주권을 찾으려는 판단이 깔려있다고 짚었다.
김 소장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일종의 인터넷 국수주의가 퍼져나가고 있으며, 최근 미국에서 중국에 본사를 둔 바이트댄스의 틱톡을 압박하는 법안을 내놓는 것 역시 데이터 국수주의와 관련된 움직임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와 비슷한 논리들이 지금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게 나오고 있다. 단순히 어떤 서비스와 기업과 기업 간의 이야기가 아닌, 국가의 안보적 차원까지 나오고 있는 게 지금 전 세계 플랫폼의 흐름이다.”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라인 사례, 미국의 틱톡 사례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해외 기술기업을 상대로 자국의 데이터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심화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지난 2020년 미국과 EU가 맺은 ‘프라이버시 실드’ 협정을 무효 판결했으며 2018년부터 개인정보 보호 정책 GDPR을 시작으로 디지털시장법, 디지털서비스법 등 해외 빅테크를 규제하기 위한 법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지난달 일본 내 데이터센터 증설에 2년간 29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등 각종 미국 기술기업들은 잇따라 일본에 클라우드 서비스 인프라를 구축하기 시작한 상황이다.
현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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