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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4차산업혁명 시대의 학교는 이러해야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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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OpenAI DALL-E 모델을 통해 생성된 이미지. © 2024 OpenAI. All rights reserved. (필자가 생성. OpenAI에서 상업적 사용이 허락됨)

 

 

 4차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공지능 도구들을 통해 학생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정확하게 집어서 그 구멍을 메우는 추가적인 과제를 부과하는 일이 용이해진다. 그 말인즉슨, 학생 개인마다 각기 다른 진도를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드디어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학생마다 각기 다른 진도를 갖고 학습을 진행해 나간다’는 개념이 우리에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읽는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이 그런 교육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학교’에서 급우들과 한 ‘교실’에 앉아 ‘같은 내용의 수업’을 듣는 교육에는 한없이 익숙하다. 

 

그렇게 한 교실 안의 학생들이 앉아서 일방적으로 같은 수업을 듣는 방식은 사실 2차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했던 방식이다. 아무리 길게 보아도 1970년대까지인데, ‘과학적 지식과 공업화를 통한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그 시기에 우리 사회는 비슷한 정도의 지적인 훈련을 받은 다수의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비슷한 내용의 수업을 듣다가 졸업 후 각기 다른 산업 현장으로 배치가 되어도 크게 적응이 어렵지 않은 시대였다.

 

그 후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의 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변화를 훑어보면, 컴퓨터, 미디어, 인터넷, 동영상 강의 등, 다양한 교육 도구들이 추가되었다. 또한 다양한 현장학습을 통해 교실 환경이 확장되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러나 구조적인 면에서는 달라진 것이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 교실에 앉아(때로 담장 밖의 교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모습은 여전했다. 2차산업혁명 시기의 교육 프레임이 3차산업혁명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교육이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요즘 청소년들은 과거에 비해 체격이 훌쩍 커졌는데, 우리 사회의 교육은 여전히 그들에게 2차산업혁명 시기의 작은 옷을 입히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옷의 색깔도 바꿔 보고 여러 장식도 달아 보지만, 이미 그 옷의 전체적인 틀은 그들에게 맞지 않은지 오래다.

 

얼마 전에 연기자 이순재 씨가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젊은 후배들의 체격을 보면, 나 때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 출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 청소년의 평균 신장을 보면 남자 174cm, 여자 161cm다. 40년 전 한국인의 평균 신장이 남자 166cm, 154cm였음을 고려해 보면, 그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학교에 가 보면, 많은 학생들이 교실 안에서 딴 짓을 한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선행학습을 해 온 터다. 그렇다고 학원을 없앨까? 그리 한다고 선행학습이 사라질 리 만무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안다. 

 

2,3차산업혁명 시대의 학교는 지식 공급을 독점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4차산업혁명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은 아니다.  고도로 민주화 된 민주 시민들은 학교 밖에서도 최첨단 배움의 도구들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그 도구들을 사용해 나간다. 학교는 예전처럼 학생들을 담장 안에 두기 원하지만, 쉽지 않다. 주먹 안에 움켜 쥔 고운 모래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다 빠져 나가듯, 학생들의 마음은 펜스 사이로 새어 나간 지 오래다.

 

오늘도 교육 현장에서 애쓰시는 선생님들께 정말 죄송한 표현이지만, 학교는 죽었다. 아니 죽은 지 오래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2차산업혁명 시대의 유물에 대고 인공호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학교를 모두 없애야 한다던가 하는 과격한 주장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죽은 학교를 다시 살리고 싶어 애쓰는 것이다. 허나 부활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죽은 이에게만 해당되는 사안이다. 스스로 죽었음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할 수 없는 이에게는 다시 살아나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 테니…….

 

리모델링을 넘어, 구조 자체를 다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유현준 교수는 그의 여러 글에서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다핵화 사회로 나아갈 것이고 교육도 그러할 것이기에 학교가 모든 교육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공교육 교사의 역할도 기존 ‘지식 전달자’의 역할에서 ‘교육 코디네이터’의 역할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게 공감한다.

 

‘개인별 맞춤 학습’이라는 표현이 생겨난 지는 오래 되었으나 실제로 이를 구현하는 일은 (인력의 제한으로 인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하다. 학생에게 과제를 부과하고 그 결과를 기계적으로 점검하여 (메타인지를 활용해) 부족한 부분을 제시하는 일은 사람보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가 더 잘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교사와 학교는 더 이상 교실 안 학생들의 학습 전체를 끌고 나가며 그의 교육 전체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대신 각 학생의 진도에 맞게 필요한 도구를 연결해 주고, 그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해 주는 교육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하면 된다. 교사가 지식 전달자에서 교육 코디네이터로 전환되고, 진정으로 학생들의 미래를 챙겨주는 일에 성공하기 시작할 때, 학생들에게서 존경받는 스승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회복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 된 지 오래지만, 교육은 여전히 중앙집권형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기업을 주도하던 시대가 지났듯, 정부가 교육을 주도하던 시대도 지났다. 학교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교육의 도우미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은 막대한 인프라를 가진 공교육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학교라는 이름 자체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교육지원센터, 배움지원센터, 성장지원센터 등의 이름으로 대내외적으로 철저하게 섬김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자. 학생 하나하나를 그의 성장 속도에 맞게 적절히 지원하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필자 소개] 이송용 순리공동체홈스쿨 교장, 전 몽골국제대학교  IT 학과 조교수

 

 

 

이송용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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