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칼럼니스트 로스 다우서트가 칼럼 ‘한국은 소멸하는가(Is South Korea Disappearing?)’를 발표했을 때 한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칼럼은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2023년 3분기 합계 출산율 0.7명을 소개하며 “한국의 인구 감소는 14세기 유럽에 흑사병이 번질 때를 능가할 정도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우서트는 “앞으로 한국은 군대를 유지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며 저출산의 원인으로 ‘한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 정도로 잔인한 입시 경쟁’을 가장 먼저 꼽았다.
다우서트의 칼럼이 발표될 무렵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보고서는 “한국은 이미 초고령 사회, 초저출산 사회로 진입했다”며 그 원인을 “높은 경쟁압력과 고용·주거 불안, 높은 주택가격과 가계부채”라고 꼽았다. 올해 2월 27일 영국 BBC는 ‘왜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않나’라는 기사에서 한국의 저출산문제를 ‘국가 비상상태’라고 규정하면서, 주요원인으로 값비싼 사교육비를 들었다.
미국 작가이자 144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마크 맨슨은 지난 1월 22일 유튜브에 올린 ‘나는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는 제목의 영상에서 “한국은 겉으로 멋지고 화려하지만, 속은 골병이 든 나라”라고 지적했다. 맨슨은 한국의 자살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위를 차지한다며 “사회적, 가족적 기대로 한국인들은 엄청난 정신 건강상의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스페인 다국적 기업 이케아의 ‘2023년 소비자 조사’는 한국을 “집에서 혼자 있을 때 가장 즐겁다는 응답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나라”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불유괘한 한국사회 진단은 위의 몇가지 사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최악의 갈등국가(영국 킹스컬리지 보고서), 한국 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프랑스 신문 ‘르몽드’), 타인에 대한 관용도가 가장 낮은 나라(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세계가치관조사’) 등 한국사회의 미래 비전이 매우 낮게 평가되는 국내외의 조사결과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 요인을 한결같이 ‘한국의 경쟁교육’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문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한국의 경쟁교육이 왜, 어느 정도로 문제인가.
한국인들은 경쟁이 불가피하고, 지금까지의 한국발전은 경쟁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경쟁교육이 우리의 미래를 해결한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미래자산은 인적자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가 발전한 데에는 그런 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나타내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당장의 삶을 낫게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이며,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여러 나라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철지난 이론을 답습하는 동안 인구 급감과 젊은이들의 결혼기피는 정부와 지자체에서 아무리 많은 현금을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치유하기가 어렵게 됐으며, 점점 더 불행한 골짜기를 향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예로 든 국내외의 많은 보고서들이 공통적으로 미래 한국의 위기를 경쟁교육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정부는 심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살인적인 경쟁교육은 건전한 발전이 아니라 청소년들의 절망과 국가의 위기를 부른지 오래다. 최근 저서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해냄출판)를 출간한 김누리 중앙대교수는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교육은 인간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적 도구를 키우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일제 시대에는 ‘황국신민’을 길렀고, 해방후 분단과 독재시대 기간에는 ‘반공투사’와 ‘산업전사’를 길렀다. 민주정부 시대에도 존엄한 인간과 성숙한 시민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부품인 ‘인적 자원’을 기르는 교육이었다. 인간을 천연자원에 대비되는 인적자원으로 보는 도구적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자본권력 시대에 ‘자원’이 된 아이들은 경쟁의 악몽에 내몰린다. 경쟁이 시작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 아이들은 상위권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적에 짓눌려 맑은 성품을 잃어버린 학업성적의 희생양이 된다. 최근 그 경향은 더욱 거세져서 요즘은 초등학생 때부터 경쟁을 내면화하며 자라난다. 대도시에서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드는 사교육비는 네 살 때부터 유치원 하나, 영어과외 하나, 수학과외 하나 등 족히 1백만 원이 들어간다. 유치원 때부터 이런 교육의 길로 가기 시작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경쟁은 더욱 가파라진다. 행복한 어린이로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다.
김 교수는 “아이에게 대안교육을 시키는 부모의 상당수가 현직교사”라고 말한다. 학교 경쟁교육이 얼마나 학생들의 인성을 망가뜨리기에 교사들이 자신의 자녀에게 대안교육을 시킨다는 말인가.
“교육을 하나의 서비스로 생각해보자. 경쟁시장 도구가 돼야만 가격도 합리적이 되고, 소비자들이 원하는 다양한 관련 상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은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한 말이다.
아이들을 ‘인적자원’이라고, 교육을 ‘서비스 상품’이라고 도구화시키는 교육은 아이의 잠재력을 신장시키지 못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취향과 능력이 있고, 그래서 인간을 존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구화 교육은 누구나의 잠재력을 들여다보지 않고 지식의 틀안에 가둬서 점수와 경쟁의 성적표를 만드는 것으로 그친다. 아무리 천재성을 가진 아이라도 한국교실에서 12년을 보내고 나면 그 천재성이 사라진다는 말이 공식화된 것이 한국교육이다. 학창시절을 즐겁게 보내지 못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결혼과 자녀출산 기피가 대세인 사회가 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청소년 행복지수는 지극히 낮다. 한국방정환재단이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에 의뢰한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비교연구’에 따르면 2021년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22개국 최하위를 나타냈다. 2018년 ‘서울대 학생복지 현황 및 발전방안 최종보고서’는 서울대 학생들의 64%가 우울증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 경쟁의 승자들이 보이고 있는 현실이 이렇게 우울하다면 그 사회의 미래 전망은 밝은 것이기 어렵다.
요즘 의대 정원 확대문제를 둘러싼 의료계의 파업에서 보듯, 전교 1등 출신들이 모인 의사 사회의 지독한 이기주의는 지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일까. 초등학교 아이를 의대반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의 마음은 경쟁의 첨단을 달린다는 기쁨 때문에 즐거운가. 다수를 패자로 만들고 교실을 경쟁의 싸움터로 만드는 교육에서 승리한 소수의 학생들은 그나마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 김학의 사건의 소극적 수사로 첫 단추를 잘못 뀄다가 끝내 압박 수사의 잘못된 관행으로 유죄로 선고됐던 혐의마저 무죄로 마무리되게 한 학교성적 1등 출신들의 검찰은 인간적으로 행복한 집단인가.
이런 오만과 미성숙을 바탕으로 같은 또래의 회사원들보다 몇배의 봉급을 받는다고, 사람들을 윽발질러 감옥에 보내는 위치에 있다고, 인간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58.5%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전체 부의 5.6%를 갖고 있는 한국의 불평등(2022년 세계불평등연구소 조사) 시스템에서는 부를 많이 차지한 사람들도 행복할 수 없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는 많이 가진 사람들도 불안과 자기착취에 내몰리기 마련이다.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의 근원은 세계의 많은 보고서들이 지적하는 그대로 목숨걸고 살아야 하는 ‘경쟁’에 있다. ‘오징어게임’처럼 드라마도 살벌한 경쟁의 내용을 담아야 하고, 방송의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은 최대치의 경쟁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은 모든 것이 그런 경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인간성은 위축되고, 아이들은 엄청난 학습노동에 시달린다. 사회가 죽어가는 데도 많은 사람들은 “경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경쟁은 좋은 것이다. 설혹 문제가 있더라도 경쟁은 불가피하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하고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고 말하며 살아간다.
독일의 히틀러는 당시 유행했던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다원주의를 신봉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 자연도태라는 자연계의 법칙이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공식을 신봉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본 결과 경쟁-우열-지배의 이데올로기를 낳았고, 그 맹신은 결국 인간 최악의 비극을 기록하고 끝났다.
그 이후 독일의 학교에서는 경쟁교육을 하지 않는다. 학교에 등수나 석차도 없고, 학교간의 경쟁도 없다. 대학입학시험도 없다. 독일은 지식을 달달 외는 것을 교육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책 읽기를 중시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도록 만들어준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 특성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진다. 경쟁을 부추긴 20세기의 독일은 최고의 전범국가였지만, 경쟁을 포기한 교육개혁을 이룩한 21세기의 독일은 최고 모범국가가 되었다. 경쟁해야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당의정일 뿐이다.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 속에서 살게 해준다.
경쟁이 아니라 자기의 꿈을 추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낡은 국가주의, 성장주의는 오늘의 아이들에게 맞지 않는다. 사회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결혼포기·출산포기를 비롯해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만든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낡고 고루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국가적인 죄악이다.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의 경쟁교육이 국가소멸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어른들의 무지한 욕심으로 후세대를 고통으로 몰아서는 안된다. 여기서 경쟁교육을 끝내고 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임순만 작가 · 전 언론인(국민일보 전 편집인)
임순만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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