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단체 "재생에너지 R&D 및 예산 삭감, 정책 전환해야"
한국 투자를 고려하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최근 업무협약(MOU)을 맺은 이후 투자 진척 상황이 더뎌지고 있다. 이는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 부족으로 인한 불확실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부산에 본사를 둔 에퀴노르코리아는 지난 5일 한국남부발전과 ‘추자도 인근 해상풍력 프로젝트 협력 모색’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에퀴노르는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기업이다. 양 기업은 추자도 해상의 우수한 바람 자원을 기반으로 초대형 해상풍력 건설의 공동개발과 지속가능한 미래에너지 보급 확대에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최종 투자 결정이 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1위 풍력발전기업 베스타스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 참석을 위해 스위스를 방문할 당시 3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한국 정부에 신고했고 3월에는 서울시와 지역본부 이전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구체적으로 베스타스는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를 싱가포르에서 서울로 이전하고, 풍력터빈 핵심 설비·부품 생산공장은 2024년 착공을 목표로 추진할 방침임을 밝혔다.
그러나 베스타스가 내년 3억 달러 투자로 신설하려는 풍력터빈 공장은 아직 어디에 설치할지 결정이 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조은별 기후솔루션 연구원은 “에퀴노르와 마찬가지로 (재생에너지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 때문”이라면서 “우리나라 해상풍력이 지난 10년간 최종 인허가 받은 건이 70개 중 4건 밖에 없다는 점이 재생에너지 투자가 어렵다는 점을 반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공급 이슈로 투자를 머뭇거리는 건 에너지 기업뿐만 아니다.
최근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은 삼성전자와 함께 약 1조원을 투자해 차세대 EUV 장비를 활용, 초미세 첨단반도체 공정기술을 개발하는 연구팹을 우리나라에 건립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마르크 뤼터 총리가 이날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동맹'(semiconductor alliance)을 담은 공동성명에 서명한 이후 나온 소식이다.
ASML은 이달 삼성전자와 협약한 R&D(연구·개발) 연구소를 기점으로 국내 제조 기반 확장 여지가 더 생긴 셈인데, 일각에서는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의 불확실성이 네덜란드 기업의 투자 확장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 ASML은 한국에 생산시설 투자를 고려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ASML의 피터 베닝크 회장이 지난해 11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화성 '뉴 캠퍼스' 청사진 공개 행사에 참석해 “향후 한국에서 R&D센터를 늘려나갈 것”이라며 “지식 이전에도 5~10년이 걸리는데 R&D가 추가되면 제조 기반 확장 여지가 생길 수 있고, 한국은 시작점에 있다”고 말했다.
ASML은 이미 경기도 화성에 투자를 단행 중이다. ASML은 지난해 11월 화성에서 ‘뉴 캠퍼스 클러스터’ 기공식을 열었다. 이곳에는 △재제조센터(LRC) △글로벌 트레이닝 센터 △익스피리언스 센터(체험관) 등이 들어선다. ASML은 이 시설에 2025년까지 24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화성 뉴 캠퍼스 클러스터의 LRC의 경우 ASML이 공급하는 노광 설비를 수리를 담당하며 제조하는 곳은 아니다.
ASML의 EUV장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 800개의 글로벌 공급업체가 제공하는 수십만 개의 부품이 필요한데, 이를 고객사에 납품하려면 다시 모듈 단위로 분해해 배송해야 한다. 다만 EUV장비 한 대의 무게가 180t이 넘고, 높이도 5m 가까이 되기 때문에 모듈로 옮기더라도 비행기로는 세 대, 육상 이동을 위해서는 방진을 위한 특수 장치가 갖춰진 대형 트럭 20대 이상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수송비가 드는 작업이다.
한국은 ASML에서 두 번째로 큰 EUV 장비 수입국이다. 노광장비를 일부 한국에서 공급할 수 있다면 한국도, ASML도 윈윈이 될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ASML은 2025년까지 회사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의 순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겠다는 넷제로를 선언했다. 향후 2030년까지는 자사의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탄소도, 또 2040년까지는 고객이 ASML장비를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탄소 발생을 제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ASML에서 발간한 탄소중립 보고서에는 “순배출 제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대만과 한국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재생 에너지를 조달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또 2025년까지 재생 에너지 조달을 위해 “태양광 패널 사용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ASML이 향후 한국에 제조 공장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충분한 재생에너지 공급이 핵심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우리나라 발전량 가운데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2021년 기준 7.15%에 불과하다. 국내 재생에너지 정책의 지지부진함이 아쉬운 대목이다.
정부는 지난 1월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확정하면서 원전 비중은 높이고 재생에너지 비중은 낮추겠다는 에너지정책 기조를 분명히 했다. 실제 10차 전기본은 2021년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상향안 대비 원전 비중은 8.5%포인트(p) 높이고 재생에너지 비중은 8.6%p 낮췄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탄소중립 협약과 관련해 한국의 국가결정기여(NDC 상향안)는 주요국의 기준연도 대비 목표연도 연평균 감축률에 비해 높은 목표수준(4.17%/년)을 제시하면서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이나 에너지 집약적 산업구조와 재생에너지 자원의 한계 등의 제약으로 인해 2022년까지 연평균 1.6% 감축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정부도 재생에너지 확대에 주력해야 할 국제적인 명분이 최근 추가됐다. 바로 지난 13일 아랍에미리트 (UAE) 두바이에서 진행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에서 발표된 최종 합의문인 UAE 컨센서스(The UAE Consensus) 때문이다.
COP28에서 각국은 화석연료의 단계적 퇴출에는 글로벌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용량 확대와 메탄 배출량 감축에는 합의했다.
합의안에서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용량 3배 증가와 에너지 효율 2배 개선, △원자력이나 탄소포집, 저탄소 수소 같은 화석연료 대체 가속화 등의 탈탄소/저탄소 기술 발전을 진척시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한국, 미국, 유럽연합(EU)등 130개국이 참여한 결의안에는 2030년까지 전 세계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지금의 3.6TW 수준에서 3배 확대한 11TW로 늘리고, 에너지효율 개선율을 현행 연 2%에서 4%로 2배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UAE 컨센서스는 법적 구속력은 없다. 하지만 이 국제 서약에는 '포괄적 국내 조치가 필요하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어 한국 정부를 향한 국내외 단체들의 재생에너지 확대 압박은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또 각국 정부 정책과 에너지원에 대한 민간 투자를 결정할 주요한 지침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환경단체들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탄소중립 목표에 맞게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실효성 있는 에너지전환정책을 추진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녹색연합은 지난 8일 성명서를 통해 “한국 정부는 COP28에서 ‘재생에너지 용량 3배 확대’ 결의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지금껏 역주행하던 국내 재생에너지 정책에 비추어 그 진정성을 크게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녹색연합은 “한국 정부는 그 간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계획에서 재생에너지 목표를 낮추고, 재생에너지 R&D 및 예산을 삭감해왔다”면서 “국제회의장에서 단순히 말뿐인 생색내기를 하는 것은 기후위기 대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부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녹색연합은 또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며 1.5도 목표는 커녕 2도 목표 달성도 위협받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핵발전이라는 위험한 해법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면서 “재생에너지로의 빠르고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과감한 정책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앞으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등의 구체적인 정책에 그러한 내용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윤수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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