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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미국의 부모들은 딸에게 왜 "예쁘다"고 칭찬하지 않을까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4.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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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pixabay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이 질문 자체가 옳은 질문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과연 세상에 “올바른 방향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Yes’라 답한다면 세상에 절대선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No’라 답한다면, 세상의 모든 선(善)은 시대나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고 달라질 수 있다는 상대주의의 견해를 따르게 된다. 

 

현대의 주류 사상은 상대주의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상대주의를 써야 할 곳에는 정작 쓰지 않고, 쓰지 말아야 할 곳에 갖다 대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대주의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도덕적 상대주의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문화에 따라 지식이나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 문화에서는 밥그릇을 들고 먹는 일이 (전통적으로) 상스럽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일본 문화에서는 오히려 밥그릇을 들어 입 가까이에 두고 먹는 것이 정석이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밥그릇을 식탁에 놓고 허리를 굽혀 밥을 먹는 일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처럼 문화에 따라 무엇이 더 나은 일인지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다. 절대적으로 무엇이 더 낫다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각자(필자 포함)는 각기 상당한 범위에 걸쳐 편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치우친 시선으로 굳이 판단할 필요가 없는 많은 일들을 판단한다. 

 

일례로 우리 사회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일정한 범위의 키, 외모, 스펙 등을 알게 모르게 강요하는 교육을 해 오고 있다. 인식론적으로 절대주의에 가까운 교육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이란 단순히 학교 교육만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우리 자녀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직간접적 메시지가 모두 교육의 범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자녀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좀 달라질 필요가 있다. 다원적 사회를 이해하고 각 개인의 차이나 문화의 차이를 포용하려면, 이 상대주의적 접근은 필수이다. 우리 아이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부모들은 딸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다. 딸의 외모를 칭찬하면 그가 한낱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으로 자라날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보다는 지적인 성장, 친절함, 인내심, 창의성 등의 내적 가치를 더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외모가 갖지 못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돕는다. 

 

그런 문화에서 자란 미국 백인 여성이 한국에 오게 되면, “예쁘다”는 칭찬을 거의 매일같이 듣게 되는데, 그로서는 매우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문화의 일부분이라 여기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일 테다. 미국 문화에서는 일단 타인의 외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일 자체가 예민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영어권 문화에서는 “얼굴이 예쁘다”, “피부가 하얗다" 등의 칭찬보다는, “오늘 멋져 보인다.(You look great today.)”는 칭찬을 즐겨 한다.

 

오늘 어디선가 서양인 친구나 동료를 만난다면, 그의 문화를 존중해서라도 우리도 그런 칭찬을 자제하는 것이 편지 않을까? 그리고 이참에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약간의 수정을 가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부터도 나의 사랑하는 딸들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자제하려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나의 딸들의 친절함과 인내심과 창의성 등, 그의 내면의 가치를 칭찬하려 한다. 아빠로서, 나의 딸들이 한낱 외모에만 신경 쓰는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진취적이고, 강인하며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문화 상대주의에서 시작한 글이 어느새 “그래도 더 나은 문화가 있을 수 있다”는 뉘앙스로 바뀐 것을 보니, 이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서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때인가 보다. 

 

(다음 글에서 만나뵙길 희망합니다. 독자 여러분, 더운 여름 잘 지내세요!)  

 

[필자 소개] 이송용 순리공동체홈스쿨 교장, 전 몽골국제대학교  IT 학과 조교수

 

 

이송용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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