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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임순만 칼럼] 최현배와 김두봉의 한글 통일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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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한글날을 보내면서 우리가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올해 578돌 한글날이라는 수치부터 감격적이다. 우리는 1446년 음력 9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일을 기념하지만, 북한은 1443년 음력 12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일을 기념한다고 한다. 명칭과 날짜는 다르지만, 한글에 대한 존중과 자부심은 남북이 같다. 

 

한글을 기념하는 날은 단지 한글 창제만을 기념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고유의 문자를 지키고 발전시켜온 사람들 역시 기려야 한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한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의 언어학계에서 모두 인정하는 것이지만, 일제 치하에서 으뜸가는 민족문화 한글을 지키고 빛낸 사람들의 뜻도 마땅히 존경받고 역사 속에서 심도있게 조명돼야 한다. 

 

주시경(1876~1914)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전문적인 이론 연구를 통해 한글 표준화를 추진하였고, 후진양성과 더불어 민족자주 차원에서 한글 보급운동을 펼치며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노력한 개척자이자 선각자다. 그는 독립협회 활동 중 한글 표기법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국어 문법을 정리했다. 독립신문 발행과 각종 토론회, 만민공동회의 자료를 민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글로 썼다. 홀대받던 우리글 훈민정음을 ‘으뜸가는 글, 하나밖에 없는 글’이란 뜻을 지닌 ‘한글’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달아주었다. 

 

주시경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이요, 그 나무를 가꾸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말을 다듬어서 바르게 말하고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기른 학자들이 많지만 그중 돋보이는 사람이 최현배(1894~1970)와 김두봉(1889~1960)이다.

 

해방 후 한반도는 강대국들에 의한 분단으로 정치적 주권에 대한 제약은 여전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권을 지킨 유일한 분야는 한글이다. 남북 모두 한글만 알면 일상생활에 별 불편 없는 나라가 됐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 글을 지키기 위한 한민족의 집념이 대단했기 때문이고, 한민족이 이 집념을 발현할 수 있도록 주시경의 제자들이 헌신적으로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해방 정국하에서 주시경의 제자들만큼 외세의 영향을 잘 막아내고 대중의 지지를 훌륭히 이끌어 낸 집단은 없을 것이다. 주시경의 수제자인 최현배는 이남에 정착했고 또 다른 수제자인 김두봉은 이북에 정착했다. 이들은 남북 양쪽에서 자리 잡아 해방 이후의 한글 운동이 상당 수준의 통일성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부산 동래에서 출생한 김두봉은 다섯 살 적은 고향 후배인 울산의 최현배를 주시경 문하로 인도했다. 그런 뒤 주시경 학파의 동기동창이 됐다. 두 사람은 국어연구학회 산하의 강습소도  함께 졸업(1911)했고, 국어연구학회의 후신인 배달말글몯움 산하의 조선어강습원도 함께 수료(1913)했다. 김두봉은 17살이 될 때까지는 한문을 배우다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학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908년에 서울에 올라와 배제고보에서 공부했다. 김두봉이 한글연구에 뛰어든 것은 스승 주시경의 영향이 컸다. 주시경 밑에서 김두봉은 말과 글이 살아있는 민족은 언젠가 독립할 수 있으며, 민족의식이 말살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주시경이 우리말본을 짓고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쏟는 동안 김두봉은 사전 만드는 일에 심혈 기울였다. 1910년에는 최남선이 주도한 사전편찬모임인 조선광문회에 참여하면서 한국어 사전 ‘말모이’ 편찬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조선광문회의 사전편찬 기획은 주시경의 때 이른 죽음(1914)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1915~1916년 무렵부터 조선 광문회 사업이 약화되면서 3·1운동을 전후해 사실상 와해되었다. 

 

김두봉은 스승이 못다 한 일을 이어받아 더 넓히고 더 열어서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묻히지 않고 영원히 자랄 수 있는 기틀을 다지기 위해 『조선말본』을 저술했다. 주시경의 문법 이론을 바탕으로 삼은 『조선말본』은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집필한 것이다. 『조선말본』은 당시까지 발표된 한글에 관한 문법서로는 가장 깊고 넓에 연구된 대표적인 연구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주시경에 의해 음성학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국어음운 연구가 김두봉에 이르러 본격적인 음성학의 이론 위에서 정리되는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 

 

김두봉은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김두봉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역사를 바로잡고 국제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알린다는 임시정부의 의도에 찬동해 사료편찬위원으로 참여했다. 사료편찬위원은 이광수, 김병조, 이원익, 김두봉, 장붕 등 10명이었다. 이들은 ‘한일관계사료’ 4권을 출판했는데, 3.1운동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한일관계사료집’ 4권을 출판한 후 편찬위원회가 해체되자 김두봉은 임정과는 거리를 두고 대한교육회에서 편집부 일을 맡았다.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 설립된 대한교육회는 교민들의 교육문제를 돕기 위한 조직으로 박은식이 회장으로 있었다. 여기서 김두봉은 한글연구에 몰두해 1916년에 펴낸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한 『깁더 조선말본』을 1922년 봄 펴냈다.

 

당시 김두봉은 수술을 받아 입원해 있으면서도 집필을 계속해 탈고했으며, 한글 자모를 구할 수 없어 상해에 있는 인쇄소를 찾아 다나며 자신이 직접 창안한 자모 분활체 활자를 만들어 책을 펴냈다. ‘깁더’라는 말은 『조선말본』의 모자라는 부분을 ‘깁고 더 보태고 하여 펴낸다’는 뜻이다. 

 

소설가 김광주는 상해에서 보았던 김두봉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골샌님이었는데, 이마에서는 노상 내 천(川)자를 그리고, 언제나 아래층 대청 한구석 책상에 쭈그리고 앉아서 어린아이 딱지장 같은 데다가 한글 어휘를 한마디씩 써가지고 한장 한장 들여다보며 말을 고르고 말을 다듬고 하는 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그후 김두봉은 상해 교포들이 성금을 모아 설립한 인성(仁成)학교에서 교포 자녀들을 가르쳤다. 인성학교에서는 10명 안팎의 학생들에게 박은식이 역사를, 김두봉이 한글창제 유래와 문법을, 김종상이 영어를 가르쳤다. 과학은 기자재를 갖추지 못해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다. 인성학교의 초대 교장은 상해거류민 단장이었던 여운형이었다. 나중에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늘어났고, 교장 김두봉 외에 교사가 5~6명으로 늘어났지만, 김두봉은 1932년 본격적으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학교를 사임했다. 인성학교 시절에도 사전 편찬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스승인 주시경이 완성하지 못한 말모이(사전) 편찬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학교를 사임한 것이다.

 

김두봉은 상해의 양옥집 2층에 방 한 칸을 세내어 수많은 카드를 벌여놓고 어휘 수집과 해석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가 모은 우리말 어휘는 30여만 개였다. 

 

1929년 8월 조선어학회 간부였던 이윤재가 상해로 가서 김두봉을 만났다. 김두봉은 “1년 정도의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어느 정도 정리될 것”이라며 “일단 원고를 탈고한 후에는 어느 곳에서든 출판하겠다고 한다면 보수라든지 원고료는 일체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말살해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사전만 나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소망이었다.

 

그러나 김두봉은 국내로 들어가 과거 경험을 살려 함께 사전편찬에 매달리자는 이윤재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동안 써놓은 원고라도 빌려주면 갖고 돌아가 사전 편찬작업의 기초로 삼겠다는 이윤재의 간청에도 김두봉은 정리가 다 되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이윤재의 거듭된 설득 끝에 김두봉은 원고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귀국한 이윤재는 약속대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200원을 마련해 김두봉에게 보냈다. 그러나 원고는 끝내 오지 않았다. 후일 이윤재는 독립자금을 보냈다는 이유로 일제에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돈을 받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김두봉은 “사전 원고는 장구한 시일을 요하는 것이므로, 그것보다도 신철자법을 많이 박아내는 것이 첩경”이라는 전갈만을 보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심지연 경남대 교수는 1993년에 발간한 저서 『잊혀진 혁명가의 초상-김두봉 연구』(인간사랑)에서 “김두봉은 조선어연구회를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어문운동단체로 개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이에 따라 사전원고를 보내지 않았으리라고 추측된다”고 밝혔다. 

 

심 교수는 결론은 이렇다. “온갖 열정을 다해 준비했던 원고였기에 완성하여 보내려고 했는데 완성하지 못해 보내지 않았는지, 아니면 애초부터 보낼 의사가 없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간직했던 원고는 해방이 되어서도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아 한글학자로서의 그의 노력을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대단히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김두봉이 원고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국내에서의 사전 편찬작업은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에 원고의 재정리에 들어갔으나 일제에 빼앗겼고, 사전편찬작업에 매달리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으로 우리말큰사전은 빛을 보지 못하다가 해방 후 원고를 다시 찾아 1947년 10월에서야 『큰사전』 첫권을 내게 되었다. 

 

김두봉은 그후 정치운동에 뛰어들어 1935년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냈고, 1942년에는 연안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 주석이 됐다. 이때 그는 ‘태항산 호랑이’로 불릴 정도로 용맹하게 일제와 싸웠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해방 뒤에 조선신민당 위원장,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 북한 국가원수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북한 정권의 2인자가 된 김두봉은 북한 언어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초대 총장이 되어 북한의 학술계를 이끌었다. 한자 폐지와 글자 개혁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맞춤법인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했다. ‘조선어 신철자법’은 한글의 중요성이나 가로쓰기의 사용 등에서 남한과 공통적인 면모가 많다. 김두봉은 1956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1960년에 어려움 속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현배는 주시경의 유업을 계승했다. 1915년에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간 최현배는 1925년에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최현배는 김두봉이 없는 한반도에서 주시경의 후계자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된 최현배는 주시경 학파의 새로운 지도자였다, 한글 운동의 이론화를 위해 노력했고, 주시경을 이어받아 언어의 규범성을 강조하며 한글 쓰기를 제창했다. 한글 통일 사업으로는 맞춤법 통일, 표준말 사정, 사전편찬, 가로글씨 제정, 조선말 소리와 로마자의 대조안 작성 및 외국어 고유명사 사전편찬을 설정했다. 

 

이어 최현배는 주시경이 마무리하지 못한 문법 이론을 체계화하고 조선어연구회를 본격적으로 개편했다. 조선어연구회는 한글날을 제정하고 기관지를 창간했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편된 후 최현배는 간사장이 돼 맞춤법과 외래안 표기법을 통일하였습니다. 이 운동에 언론계, 교육계, 종교계,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남북으로 흩어진 결과, 남과 북은 똑같이 한글 전용에 성공했다. 민족이 분단되고 외국 군대들이 주둔한 상황에서도 유독 한글만큼은 진정한 해방을 맞이했다. 그 결과 80여 년의 긴 세월 분단이 지속되었음에도 남과 북은 한글을 사용해 소통하고 있다.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주시경은 한글의 기초를 닦았고 그의 수제자들인 김두봉과 최현배는 해방 이후 남과 북의 언어를 정립하는 데 앞장섰다. 오늘날 남북의 언어정책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하지만,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규칙은 동일한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과 북이 통역 없이 동일한 언어를 기반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이다.

 

지난 2005년 남과 북의 국어학자들이 금강산에 모인 것이 계기가 돼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을 시작했다. 남북 학자들은 “남북 분단으로 인해 날로 더해가는 남북 언어의 이질화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며 통일 국어 대사전을 함께 편찬하기로 뜻을 모으고 국어 대사전의 이름을 ‘겨레말큰사전’으로 정했다. 그 뒤로 2015년 12월까지 모두 25회의 남북공동편찬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남북관계 악화로 26차 회의는 아직 열리지 못하고 있다.

 

그간 편찬작업은 꾸준히 진행돼 편찬사업회는 2021년 3월 30만7000여 개의 올림말이 수록된 1만7810쪽 분량의 『겨레말큰사전』 가제본을 제작했다. 편찬사업회는 남북공동편찬회의가 다시 열리면 이 가제본을 바탕으로 북쪽과 협의를 해 남과 북에서 『겨레말큰사전』을 종이사전과 전자사전으로 정식 발간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청소년과 일반 국민에게 남북언어문화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할 수 있도록 ‘겨레말큰사전’ 압축판인 『미리 만나는 겨레말 작은사전』을 냈다. 

 

이념과 체제 대립에 관한 사안이 아닌 만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이 하루 속이 재개돼 민족의 옥동자를 산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소명이다. 

 

임순만 작가 · 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임순만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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