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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임순만 칼럼] 새로운 힘의 분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4.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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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리아] 한 사회에 새로운 힘이 마그마처럼 솟아오르는 때가 있다. 어떤 계기가 도래했다는 신호다. 그 분출하는 힘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미래는 달라진다.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의 문제는 그 사회의 잠재력은 물론 역사성과도 연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탄핵 문제를 놓고 2030 세대가 광장으로 몰려나오는 것은 새로운 힘 분출의 뚜렷한 특징이다. 더욱이 여성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 것은 특히 주목해야 할 사회현상이다. 우리 역사에 젊은 세대가, 더구나 여성들이 이렇게 주도적으로 일어선 적은 없었다. 4·19처럼 학생들이 중심이 된 변혁운동이 있었지만, 작금의 시위는 학생운동과도 다르다. 학생운동이 대학생이라는 학내 지성인 집단의 변혁운동으로 추동되는 것이라면, 이번 2030 세대의 시위는 그보다 훨씬 광범위한 젊은이들이 시위의 주도 세력이 없이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하다.

지금 2030 세대들이 사용하는 시위용품과 방식은 투석도 아니고 촛불도 아니고 민중가요도 아니다. 반짝이는 시위봉과 ‘다시 만난 세계’ ‘아파트’ ‘쏘리쏘리’ 등 따라부르기 쉽고 경쾌한 신세대들의 K-팝과 신나는 율동이다. 젊은이들이 K-팝 ‘집회 플레이리스트’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면 5060이 이를 익혀서 광장으로 나오는 식이다.

탄핵 집회 플레이리스트가 이처럼 세대 화합을 이끌면서 시위 필수품으로 떠오른 응원봉도 청년과 중년을 연결하는 아이템이 되고 있다. 온라인 중고 거래 앱을 통해 40대 혹은 50대 어른들에게 아이돌 응원봉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젊은이들이 잇따르고, 4050 세대들은 커피나 김밥을 선결제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제뉴스에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여기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이 노벨상 수상식장에서 말한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저마다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등의 경구(警句)가 확산하면서 집회의 깊이까지 더하고 있다.

이 새로움은 역사의 새 변화를 요구하는 표상인데, 이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미래의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기성세대들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새로운 힘이 분출된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역사의 불결이 크게 바뀌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시기를 근현대사로 좁혀서 살펴보자. 가장 먼저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일어선 동학은 저물어가는 조선 말기 낡은 사회구조의 쇄신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개혁 사상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표방한 동학은 5천년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인본적인 혁신의 정신이었다. 이 변혁 기운이 분출할 무렵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폭정이 있었고, 이에 맞서 일어선 동학농민운동은 전주성까지 장악하고 폐정개혁 12조까지 달성해 냈으나 조선 정부의 청나라 군대 요청과 일본군의 무단 상륙으로 패배했다.

동학의 패배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졌고, 일본의 침탈로 결국 조선은 나라를 빼앗겼다. 세도정치의 부정과 삼정의 문란 끝에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임술농민봉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등 연이은 농민들이 운동이 있었음에도, 이 힘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망국의 길을 걷고 말았다.

1919년의 3·1 만세운동은 전국민적인 힘이 분출한 혁명이었다. 숫자를 최대한으로 줄인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더라도 당시 조선 전체 인구 1천680만여 명 중 106만 명이 참여한 3·1 만세운동은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임정은 남의 나라 땅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어 일제 패망 시까지 일제와의 전쟁을 추진했다. 이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의 반영(反英) 독립운동, 베트남,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과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45년 말 신탁통치반대 역시 전 국민이 궐기한 새로운 사상과 유형으로 전개된 운동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 문제 해결 방안을 명시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동아일보의 오보·왜곡으로 잘못 전해지며 폭발한 반탁운동은 주로 우익 세력이 주도하는 반소반공(反蘇反共)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역시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했던 좌익 세력은 우익에 맞서 곧바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한국 정치의 좌우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남한을 지배한 미군정의 정치력 부족으로 결국 반탁운동은 이승만의 단정 선언으로 이어졌고,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비극을 불렀다.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헌법 유린,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6일까지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이다.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이 참여함으로써 혁명으로 발전했고, 경찰의 유혈진압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고, 4월 혁명기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 단위 민주화운동이 된 이 혁명은 헌법을 수호하지 않는 지도자는 국민 속에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시켰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 철폐, 학원과 언론의 자유화 등을 내세우며 시작된 지역 운동이다. 박정희 정부의 군대 투입으로 단기간에 진압되었지만,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켰다.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 이념을 계승한 민주항쟁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 운동의 대응 방안을 놓고 박정희 정부는 내부적으로 갈등을 빚다가 박 대통령이 살해되며 유신체제의 막을 내렸다.

1987년 6월 항쟁은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시킨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시위 중 최루탄에 맞고 숨진 이한열 사망 사건으로 100만 명 이상의 넥타이부대가 거리로 쏟아져나온 6월 항쟁은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시위와는 거리를 두었던 직장인들이 가세해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동력을 분출했다.

2016년 겨울 광화문 촛불집회는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를 탄핵으로 퇴출시킨 새로운 광장의 힘을 분찰했다. 2019년 10월 중순부터 연말까지 매주 토요일에 전개된 촛불집회는 10차례의 집회로 누적 참가 인원 1,000만명을 돌파했고, 국회는 국정농단을 이유로 박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끌어냈다. 탄핵안 가결 이후에도 수십만 시민들의 집회 참여가 이어졌고, 19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8인 전원일치의 찬성으로 박 대통령 파면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 국민의 힘이 분출할 때 그것을 제대로 수용하면 커다란 역사적 발전을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과거와 같은 힘이 답습해 분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동력이 바탕이 됐다는 것(1919년 3·1만세 혁명=민족적 힘, 1960년 4·19혁명=학생 파워, 1979년 부마항쟁=지역주민들의 힘, 1987년 6월 항쟁=직장인들의 파워, 2016년 촛불 운동=범시민적 파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힘이 분출하더라도 국가적으로 이를 잘 수용해내지 못하면 동학농민운동과 신탁통치반대운동의 예에서 보듯 엄청난 역사의 파국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2030 세대를 주축으로 한 윤석열 대통령 탄핵 항쟁은 현재 진행 중이다. 새로운 파워의 분출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국회의 탄핵 가결은 끌어냈지만, 앞으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기까지는 많은 고비가 있으리라고 예상된다. 이 새로운 파워 분출이 대통령 탄핵과 검찰개혁까지를 성취해 낼 수 있을지, 아니면 역사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운동이 될 것인지 주목되는 나날이다.

임순만 작가 · 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임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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