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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임순만 칼럼] 절망의 시대를 꿈으로 바꾼 예술가들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5.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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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클림트 '수풀 속 여인'

[이코리아] 역사적으로 유럽 최고의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꼽는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중부유럽의 패권을 휘어잡았다. 19세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칭제 이전까지 유럽에서 황제가 있었던 국가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왕조의 오스만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5세기부터 선출직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연달아 배출하고 활발한 결혼 동맹을 통해 오스트리아 왕가와 스페인 왕가를 형성해 수백 년간 유럽의 상당한 영역을 지배했다. 이 가문의 군주 중에는 예술 후원과 수집에 열광적인 이들이 많아 19세기 말 비엔나 문화예술을 특징적으로 부흥시켰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는 유럽 문화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결정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회 중의 하나로 꼽힌다. 유럽의 결정적인 문화예술의 역사란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미술 △17세기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의 ‘네덜란드 황금시대’ △19세기 중반 파리 모네와 동료 화가들의 인상주의 △19세기 말을 전후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구스타프 클림트에서 에곤 실레에 이르는 화가들이 이끈 빈(비엔나)의 회화가 꼽힌다.

특히 19세기 말 빈의 문화예술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기에 화려하게 꽃피웠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제국의 존망이 걸린 위기의 시대에 학문과 문화·예술 전 영역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규모로 배출됐다는 사실은 인류사에서 크게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수백 년을 이어온 제국의 문화유산이 막바지에 활화산처럼 분출했다는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종말기에 기록되는 제국의 정신 유산은 특히 화려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 비엔나는 유럽에서 가장 앞서가는 음악의 도시였지만, 종말기인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음악뿐 아니라 수학, 철학, 경제학, 정신분석학, 의학, 과학철학, 건축 등에서 단기간 내에 세계적인 대가들이 200여 명이나 솟아올랐다. 이를 일러 오스트리아 작가 헤르만 브로흐는 유럽혁명이 일어난 1848년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멸망한 1918년 사이의 기간을 ‘즐거운 종말’이라고 칭했다. 이는 전통적 사조와 현대적 사조가 접합해 프로이트, 브렌타노, 후설, 부버, 비트겐슈타인, 루카치 등의 사상가들이 집중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정신사는 비엔나 사회 전 영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문화예술의 새로운 꽃을 피우는 쪽으로 이어졌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회는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변화를 꿈꿨던 예술가들의 활동과 모더니즘으로의 전환 과정을 레오폴트미술관 소장품 총 191점으로 선보이는 규모가 큰 전시회다. 빈에 소재한 레오폴트미술관은 에곤 실레 연구와 그의 작품 수집에 일생을 바친 의학자 레오폴트가 설립한 미술관으로, 실레 연구에 있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곳이다. 국립 벨베데레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클림트의 ‘키스’, 오스카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 실레의 ‘가족’과 ‘포옹’ 등 오스트리아 국보급 작품은 오지 않았지만, 제국의 종말기에 나타났던 즐거운 탄생을 감상할 수 있는 드문 전시회다.

전시회 초반부는 새로운 시대에 예술의 자유를 찾고자 클림트가 창립한 비엔나 분리파의 역할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활동을 미술, 음악,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준다. 특히 빈 회화를 찬란하게 수놓은 세 사람, 즉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의 작품은 주목해야 마땅하다.

클림트 '키스'

클림트(1862~1918)는 보수적인 미술계에 불만을 품고 종합예술을 추구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며 빈 전위 미술운동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가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철학>, <의학>, <법학>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철거되어 현재는 사진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천장화 ‘학문시리즈’는 그를 유럽 최고의 화가로 자리매김하는 그림이 되었다. 이후 클림트는 병, 육체의 노쇠, 빈곤 등의 주제를 추한 모습을 그대로 주저 없이 묘사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과 작별하고 이른바 ‘황금시대’를 열었다.

나아가 클림트는 모자이크 같은 비잔틴 미술과 이집트 미술의 요소를 도입해, <키스>처럼 황금빛 바탕과 기하학적 패턴이 어우러지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가 눈길을 끈다.

코코슈카 '피에타'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는 빈에서 격렬히 일어난 표현주의 운동에 참여해 내면의 심리를 관통하는 독특한 표현양식과 이미지를 선보였다.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왜곡된 형상을 주로 그렸다. 보수적이고 통념적인 요소를 과감히 버린 그의 그림은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과 차갑고 어두운 색채, 그리고 강하고 거친 붓 터치로 강력한 표현주의를 구사했다. 코코슈카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와의 격정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바람의 신부>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굳혔다.

코코슈카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기병에 자원입대하여 전선에 나갔다가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 어렵게 회복한 후에는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여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지방을 여행했고, 1931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히틀러 독재정권의 탄압이 심해지자 프라하로 옮겨갔다. 독일에서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간주하여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조차 금지되었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에곤 실레(1890~1918)는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선들을 더욱 발전시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실레의 자화상은 고뇌하는 미술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실레는 풍경화에서조차 긴장감이 감도는 그림을 그렸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책 표지화로 사용된 <네 그루의 나무>에는 소멸하는 생명의 슬픔이 배어있으며, 음산한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늦가을의 작은 나무>는 안쓰럽고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이번 전시 후반부를 장식하는 실레의 그림은 압도적이다. 그의 자화상과 인물화, 풍경화와 누드화 등을 고루 감상해 보면 실레의 독보적인 표현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드로잉도 20여 점이 나와 있다. 유화 작품의 밑그림이거나 심심풀이 정도로 평가받는 다른 화가들의 드로잉과 달리 실레의 드로잉은 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양식으로 평가받는다. 실레 작품의 핵심이 ‘선’이기 때문이다.

코슈카 '바람의 신부'

클림트, 코코슈카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실레는 히틀러에 의해 ‘퇴폐화가’로 몰렸던 화가다. 실레는 1918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뜨면서 잊힌 화가가 되었다. 히틀러는 청년 시절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미술학도였다. 그해 실레는 일반학교에서는 적응을 하지 못해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응시했다가 최연소로 합격했는데, 그 이후 실레의 그림은 집중적으로 히틀러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퇴폐 화가로 몰린 실레의 작품은 압수당했고, 전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후 1938년 베를린에서 ‘위대한 독일전’과 ‘퇴폐미술전’이 나란히 열렸는데, 관객들은 위대한 그림이 아니라 퇴폐 화가로 몰린 실레의 그림에 줄을 섰다. 그것이 실레 부활의 신호였다. 그의 그림은 개인의 고독과 절망을 표현했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뼈가 앙상한 남녀들의 적나라한 표현은 현대인들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 뉴욕에서부터 실레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이후 실레의 그림은 해가 갈수록 젊은이들 사이에 호소력 있게 퍼져가고 있다.

실레 '포옹'

화가가 죽은 후 백 년 가까이 지나서 바람이 부는 경우는 지금까지의 미술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누드 화가’ ‘드로잉 화가’로 폄하되었던 실레는 현대미술의 혁명을 이끄는 화가로 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실레를 조명하는 움직임이 더욱 넓어져 연극, 음악, 무용, 영화 등 문화예술 전반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엔 실레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에곤 실레, 백년 간의 잠』이 몇 년 전에 출간되기도 했다.

긴 설 연휴 기간에 감상할만한 전시회다.

한편, 서울 중구 남대문로 롯데백화점 본점 애비뉴엘 9층에서는 디지털로 구현하는 ‘구스타프 클림트 : 타임리스 뷰티’전을 열고 있다. 전시공간에 디지털 캔버스(패널)를 설치하고 프로젝트에서 내보내는 영상으로 전 공간을 클림트 작품 영상으로 구성하는 영화형 50분짜리 디지털 아트 전시회다.

 

 

 

임순만 작가 · 국민일보 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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