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는 12일 상속세 과세체계 합리화를 위해 유산취득세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자료=기획재정부
[이코리아] 정부가 사망자의 전체 상속재산이 아니라 개별 상속인이 각각 물려받은 상속재산에 대해 과세하는 방식으로 상속세를 개편하기로 했다. 불합리한 과세구조 개선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환영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고액 자산가에 대한 감세로 세수부족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2일 이 같은 내용의 ‘유산취득세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유산취득세는 사망자(피상속인)의 전체 유산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기존 방식(유산세)과 달리, 상속인들이 취득한 각 상속재산별로 과세하는 방식을 말한다. 기존 방식은 전체 유산 규모만 파악하면 과세가 가능해 집행이 용이하지만, 개별 상속인이 물려받은 재산에 비해 높은 누진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조세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반면 유산취득세는 상속인별로 어느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았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행정적인 부담이 가중되지만, 각자 받은 재산에 따라 세금이 결정되는 만큼 기존 유산세 방식에서 발생한 과도한 누진과세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전체 유산에서 모든 상속인의 공제 합계를 일괄 차감하는 것이 아니라 각 상속인별로 따로 공제를 적용하기 때문에, 장애인 공제 혜택을 장애가 없는 상속인들도 함께 받는 등 공제 실효성이 떨어졌던 문제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유산세를 유산취득세로 개편함에 따라 인적공제 제도 또한 전면 개편할 계획이다. 기존에는 자녀 수와 관계없이 일괄 5억원의 공제가 적용됐으나, 앞으로는 이를 폐지하는 대신 자녀 1인당 5천만원이었던 공제한도를 5억원까지 확대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2명일 경우 기존에는 5억원까지 일괄공제가 적용됐으나, 유산취득세 방식으로는 각각 5억원씩 총 10억원의 공제가 적용된다.
배우자 공제의 경우 기존 최대한도(법정상속분 이내 최대 30억원)을 유지하기로 했지만, 10억원까지는 법정상속분을 초과하더라도 공제하기로 했다. 만약 유산 20억원을 배우자에게 10억원, 자녀 2명에게 각 5억원씩 물려주는 경우 개편된 유산취득세 제도 하에서는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 OECD 24개국 중 20개국이 유산취득세 채택
정부의 상속세 개편안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으로 엇갈리고 있다. 한국세무사회는 12일 성명을 내고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정부가 국민의 상속세 부담을 완화하고, 조세 형평성을 높이기 위해 상속세를 유산취득형 과세체계로 개편하는 이번 발표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세무사회는 “상속세는 도입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유산세 과세방식과 정부부과제도 형식을 유지하는 후진적 납세제도를 유지해 부동산 가격 상승 등 물가상승에 따라 국민의 상속세 부담이 높아졌다”며 “상속세를 납부하는 대상도 많아져 상속세가 과거처럼 일부 부자들만의 세금이 아니라 이제는 국민 일반도 부담하는 ‘국민 세금’이 됐다”고 말했다.
세무사회는 이어 “기존 상속세는 피상속인의 전체 유산을 기준으로 과세되어 상속인이 받은 재산보다 과도한 세부담이 발생하는 불합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며 “이번 유산취득세 전환이 기존 상속세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국민이 원하는 조세제도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주요국은 대체로 유산세가 아닌 유산취득세 방식으로 상속세를 부과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2021년 발표한 ‘OECD 회원국들의 상속 관련 세제와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OECD 회원국 38개국 중 상속 관련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는 한국·미국·영국·프랑스 등 24개국이었다.
24개국 가운데 우리나라와 같은 유산세 방식을 채택한 국가는 덴마크·영국·미국·한국 등 4개국뿐이었으며, 유산취득세 방식인 국가가 20개국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입법조사처는 “많은 학자들은 상속세를 비롯한 유산 세제의 강화가 소비를 조장하고 저축 및 투자의 저해 요소로 작용하며 이를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생산증가·고용확대·자본축적 등을 통하여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장기적으로 세수증가에도 기여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며 “유산세 방식보다는 상속인 개개인에 대하여 유산의 귀속에 의한 소득에 대해서만 과세하는 유산취득세 방식이 상속세의 이중과세 논란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 상속세 ‘개편안’ 아닌 ‘감면안’... 세수부족 대책은 어디?
반면, 일부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상속세 개편안이 초고액 자산가들의 상속세 부담을 낮춰 결국 세수부족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12일 성명을 내고 “정부는 이번 제도 개편이 과세형평 제고와 공제 실효성 개선을 위함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상속세 부담 완화를 위한 제도 개편”이라며 “유산취득세라는 명분 아래 공제액만 대폭 확대해 초고액 자산가에게 돌아갈 세 부담을 대폭 감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유산취득세 전환 방안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상속세 세수를 현행 수준으로 유지하겠다는 세수중립성에 대한 정부의 약속이 없다는 점”이라며 “상속증여세가 국세 수입의 4.5%(15.3조 원)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세수중립 없는 상속세 개편은 재정 기반을 약화시키고 자산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라살림연구소 또한 정부의 상속세 개편안에 대해 “상속세 ‘개편안’이 아닌 인적공제 10배 확대한 ‘상속세 감면안’”이라고 평가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정부의 상속세 개편 방안은 상대적으로 상속가액이 적은 상속인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보다, 상속가액이 큰 상속인의 부담이 더욱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다”며 “최상위 1% 피상속인이 전체 상속세의 약 90%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상위 재산가의 상속세의 부담을 낮추는 법안은 필연적으로 초고자산가에게 혜택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이어 “상속인의 줄어든 상속세 세수만큼 다른 국민이 소득세 증대 또는 국채 등의 방식을 통해 그만큼 재원을 나눠서 부담해야 한다”며 “정부가 대폭적인 상속세 감세안을 국민과 국회에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면, 정확한 세수 감소 효과와 이에 따른 재정적 대책도 함께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임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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