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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임순만 칼럼] 이어지고 흘러가는 신경림의 시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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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세상을 떠난지 한달을 지났는데도 그를 기리는 여러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창작과비평’을 비롯한 계간문예지 2024년 가을호들이 일제히 그의 시를 돌아보는 특집을 마련하고 있고, 서점에서는 그의 시집들이 조용히 팔린다.

 

시인은 지난달 22일 89세를 일기로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문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장례위원장을 맡은 염무웅 평론가는 “신경림 시인은 한국의 문단사를 바꾼 분”이라고 평가했을만큼 그의학적 생애는 다복했다. 그의 시편들은 그가 떠난 세상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다.   

 

신경림의 시에서 다른 어떤 시인의 시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못난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언어의 천연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평가에 대해 “백석이나 이용악 등 우리 시사에서 한세대 이상 끊어졌던 납월북 시인들의 전통적 맥을 다시 이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것의 그 다음 가는 특징이다. 그의 시는 못난 사람을 생래적으로 좋아한다. 못난 사람을 천연스럽게 좋아하는 것과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쓴다는 것은 비슷한 말이지만, 상당히 다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 쓰는 시는 (가공적으로)만들어지는 것일 수 있지만, 천진스럽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의 가락은 만들지 않고 넘쳐서 흘러나온다. 

 

‘민중시인’이란 한 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속에서 그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민중시인이다. 그러나 신경림을 말할 때 ‘민중시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는 ‘민중’ 중에서도 가장 힘없는 ‘못난 놈’들을 좋아하여 노래한다. 그러니 신경림은 자신의 노래를 과장하지 않는다. 피상적으로 부르지도 않는다. 오래 곰삭은 누룩이 온도와 습도가 가장 적합한 조건에서 툭 터져 발효하듯, 오래 품어온 못난 사람들에 대한 정이 시 속에 녹아 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먹걸리들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시 ‘파장(罷場)’ 전문)  

이 시는 1956년에 등단한 시인이 동국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북 충주 노은면에 낙향해 촌놈으로 살 때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이발소 앞에서 참외를 깎아먹고, 약장사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고, 밤이면 방앗간집 윗방에서 ‘섰다’판을 벌이며 사는 무지렁이의 나날이 핍진하게 펼쳐진다. 그는 당시 백명에 한명꼴도 안되는 대학졸업자이며, 시단에 공식 등단한 시인이었다. 그런만큼 그에게 어느 정도의 ‘난체’하는 자부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신경림의 시에는 그런 무게감이 없다. 그는 의식의 사치를 말끔히 버리고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고 쓴다. 그 자신 속속들이 ‘못난 놈’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진술이다.

 

신경림은 데뷔한 이래로 10여년 동안 시를 접어두고 있다가 1965년 겨울 동료 시인 김관식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면서 다시 시를 쓰게 됐다. 이때 펴낸 첫시집 <농무>는 한국시단을 흔들만큼 대단한 충격을 줬다. 소설가 이문구가 자신이 일하던 잡지 ‘월간문학’의 이름을 딴 월간문학사 명의를 빌려줘 출판된 <농무>는 발간되자마자 민중들의 애환과 정서를 일체의 수식 없이 단숨에 시사 위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은 다음해 창비에서 출범한 ‘창비시선’의 첫 권으로 증보 출간돼 현재 500권을 넘어선 창비시집 시리즈의 기원이 됐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시 ‘농무(農舞)’ 전문)

 

농무는 두렛일을 하며 두레패들과 함께 노는 농악과 춤이다. 농무의 무대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이어야 마땅하지만, 이농으로 쇠락해진 농촌에서 농무는 운동장 가설무대에 올리는 꼭두각시 노름과 같은 것일뿐이다. 징이 울리고 막이 내리면 ‘우리’는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해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쇠전을 돌며 킬킬거리는 그들은 임꺽정을 흉내냈든, 그의 배신자 서림이의 역을 맡았든, 농사는 여편네에게 맡겨두고 꽹가리를 치는 ‘못난 놈’일 뿐이다. 아무리 놀아봤자 쪼무래기 처녀애들이나 꼬일 뿐 누가 쳐다보지도 않는다. ‘농무’는 그런 사람들에께 바친 시가문학의 장려한 월계관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시 ‘목계장터’ 전문)

 

장돌뱅이의 삶을 자연에 비유해 운명론적으로 노래한 시다. 신경림은 농사 짓는 삶을 떠나 방물장수가 되어 한동안 장터를 떠도는 나날을 보냈다. 이때 얻은 시가 ‘목계장터’다. 목계는 1930년대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이기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을 이루던 나루였다. 수곡선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로 내륙항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였다. 

 

연전에 신경림 시인과 그의 친구인 유종호 문학평론가와 함께 목계나루로 늦여름 문학나들이를 다녀온 적이 있다. 우리 셋은 충주고 선후배였다. 신경림은 아무리 일을 해봤자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를 포기하고 장터를 떠돌며 박가분을 파는 방물장사로 살았던 젊은 날을 이야기했다. “목계나루에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지역과 연계하는 강변장이 설 때면 각지에서 장꾼과 놀이패와 들명이, 날명이들이 몰려와 난장을 벌이고 북새통을 이뤘다. 그때는 ‘목계장터’와 같은 시가 내 마음속에 언제나 흘러다녔다. 나의 내부에 리듬이 있었기 때문에 천치처럼 짐부리고 앉아있는 나날이 서럽지는 않았다.”

 

시 ‘목계장터’에는 산과 하늘, 구름과 바람, 잡초와 잔돌, 들꽃과 방물장수 등 유랑과 정착의 이미지가 부딪치며 갈등을 일으킨다. 이런 시어 속에서 시인은 “~라네” “~하네”의 독백적인 진술을 통해 설움을 이겨낸다.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자연속에 가라앉는 구도다. 어떤 무게감도 말끔히 제거해낸 이런 천연성은 책을 읽는다고 갖추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르침이나 수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못난 자의, 서로의 얼굴에 쓰여있는대로 못난 놈의 순수함이 아무런 가식없이 편하게 오가는 속에서 갈등이 해소된다. 바로 이것이 신경림 시의 힘이다. 

 

이제 그만둘까 보다, 낯선 곳 헤매는 오랜 방황도./ 황홀하리라, 잊었던 옛 항구를 찾아가/ 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밟는다면./ 차가운 빗발이 흩뿌리리, 가로수와 전선을 울리면서./꽁치 꼼장어 타는 냄새 비릿한 목로에서는/ 낯익은 얼굴도 만나리,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리리./ 이내 어둠은 옛날의 소꿉동무처럼 다가오고,/ 발길 따라 깊숙한 골목 여인숙 찾아 들어가면/ 눅눅하고 퀴퀴해서 한결 편해지는 잠자리./ 꿈인 듯 생시인 듯 들리리, 네가 가 잠들 곳 또한/ 이같이 익숙한 곳 편안한 곳이라는 소리가, 먼 데서. (시 ‘누항요(陋巷遙)’ 전문)

 

이 시는 먼저 제목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누항(陋巷)’이라면 ‘누추한 골목’, 곧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노래라는 뜻의 요(謠)가 아니라 멀다는 뜻의 요(遙)를 붙였다. 누항요(陋巷遙), 자못 심중해지는 말이다. 나그네 길을 가는 사람이 (돌아갈)먼 곳을 그리워하는 노래, 즉 죽음을 바라보고 부르는 영혼의 노래가 아니겠는가.

 

시인은 오래 전 떠난 고향을 찾아가 저잣거리를 헤맨다. 소금에 타는 꽁치와 꼼장어도 즐기고 어둠을 따라 깊숙한 골목 여인숙으로 들어간다. 바로 이 대목에서 놀라운 진술이 다시 살아나온다. ‘눅눅하고 퀴퀴해서 한결 편해지는 잠자리’라고! 이렇게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시단에서 신경림이 으뜸일 줄로 안다. 거듭 말하거니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는 진술의 바로 오른편에 위치할 만한 이 진술은 학습이나 수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순수한 시인의, 가장 낮고 소박한 경지에서 얻을 수 있는 인식의 황금부분에서 나오는 절규다. 

 

이쯤되면 ‘깊숙한 골목 여인숙’은 칠성급 호텔이라한들 지상의 어떤 숙소로서도 비교할 수 없는 안식처가 된다. 문학의 공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위안으로 가득한 숙소다. 문학은 누구에게 압력을 가하지도 않고, 억압을 느끼게 하지도 않는다. 그 억압하지 않음을 통해 문학은 인간을 자유스럽게 만들고,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인간들의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문학과 예술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망 속에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권력과 지위, 경제와 물산(物産), 학문과 지식, 노동과 휴가는 가진 만큼 못가진 사람을 억압한다. 직접적으로 억압하지는 않더라도 못가진 사람을 주눅들게 하거나 소외의 그늘에 머물게 만든다. 그러나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진술이 주는 감흥은 그런 소외의 그늘을 없앤다. 그러므로 신경림은 못난 놈들을 지상의 천국에서 살아가게 만든다. 

 

신경림은 늙어서도 하루에 시 백여편을 읽었다고 한다. 집으로 배달돼오는 시집이 하루에 꼭 한두권은 되고, 계간지 등 시 전문지에 실린 시와 동인지까지 포함하면 그가 하루에 읽을 시는 그 정도였다고 한다. 부담되는 분량이다. 하지만 그는 가능한한 읽는다고 했다. 하루에 백편의 시를 읽는 시인은 태어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여기서 태어났다는 것은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시인에게는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일매일 엄청난 훈련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훌륭한 시인은 그런 훈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태어나는 존재다. 당연히 시도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흘러넘치고 쓰여지는 것이다. 신경림은 시집 <뿔>의 자서(自敍)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요즈음 시도 한그루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르고 지나간다. 그래도 시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그냥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한때는 고통스럽던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새들이 몰려와 그 나무에서 논다. 오래도록. 세월에 상관없이….

 

임순만 작가 · 전 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임순만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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