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급발진 의심사고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급발진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에게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소비자는 제조사가 보유한 핵심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고 전문지식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만큼, 소비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입법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앞서 지난달 1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입증책임 전환을 위한 제조물책임법 개정에 관한 청원’이 올라왔다. 지난 2022년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로 숨진 12살 이도현 군의 유가족이 게시한 것으로, 이들은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사고 당사자 및 유가족이 아닌 자동차 제조사가 결함이 없음을 증명하도록 하는 내용의 제조물책임법 개정안, 이른바 ‘도현이 법’이 연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원인은 “급발진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사고 원인 규명을 비전문가인 사고자나 경제적 약자인 유가족이 많은 비용이 드는 기술적 감정을 실시해서 증명해야 된다는 억울하고 답답한 대한민국 현실에 울분이 터진다”라며 “제조사도 증명하지 못하는 결함 원인을 소비자에게 증명하라고 하는 현행 제조물책임법안은 국가폭력”이라고 말했다.
청원인이 함께 게시한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에는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제조사는 자동차에 피해자가 주장하는 결함이 없거나, 그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하며 ▲피해자 요청 시 제조사가 관련 내부 자료를 제출하고 법정 외 신문·녹취에 응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유가족은 이미 지난 2월 같은 내용의 청원을 올려 5만 명의 동의를 받아 청원 성립 요건을 충족한 바 있다. 이후 해당 청원은 국회에 회부됐으나 계류가 거듭되면서 21대 국회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결국 폐기됐다. 22대 국회 출범 후 다시 올린 도현이 법 제정 청원은 성립 요건인 5만 명을 넘어 11일 현재 8만6718명의 동의를 얻은 상태다.
◇ 자동차 제조사의 급발진 의심 사고 손해배상 ‘0’건, 왜?
급발진 사고의 입증 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에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는 양측의 정보 비대칭성 때문이다. 소비자에 비해 차량에 대한 핵심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고 전문적인 지식도 충분한 제조사가 분쟁 과정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5건의 제조물책임법 개정안 모두 법안 발의 취지로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에서는 “자동차 급발진 의심사고와 같이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자동차의 경우 결함 등의 추정 요건조차 비전문가인 피해자가 증명하기는 매우 어려워 피해구제의 실효성이 미미하다”고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 국내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해 법정에서 피해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윤종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일 한국교통안전공단(TS)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년부터 접수된 급발진 신고 236건 중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국회입법조사처 또한 지난해 5월 발간한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의 입증책임 관련 쟁점과 향후 개선 방안’ 보고서에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급발진과 관련해 제조사의 제작 결함을 인정한 사례는 없다”라며 “한국교통안전공단은 매년 급발진 의심으로 신고된 차량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을 발의한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은 “현행법이 개정된 이후 국내에서 자동차 급발진 사고가 일어났으나, 이로 인해 제기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제조사가 손해배상책임을 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라며 “자동차와 같이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조·가공돼 피해자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였는지 여부 등을 증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입증책임이 전환되어야만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고 말했다.
◇ 미국·유럽, 소비자 입증책임 완화 노력... 한국은?
해외 주요국에서도 자동차 급발진이 인정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일부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소비자의 입증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다양한 규정을 마련해 두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제조업자의 과실 여부를 피해자가 입증하도록 요구해왔으나, 지난 1963년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의 그린맨 사건 판결 이후 제조사의 무과실 책임을 강조하는 ‘엄격책임’(Strict Liability)에 관한 법리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엄격책임’은 제조업자가 물품의 제조·매매과정에서 모든 주의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물건의 결함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을 때도 그에 대한 책임을 부담하는 것을 말한다. 해당 사건은 그린맨(Greenman)이라는 사람이 유바(Yuba Power Products)라는 제조사가 만든 목공용 공구를 사용하다가 기계 결함으로 나무 조각이 튀어 부상을 당한 사건이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제조사의 엄격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는데, 이후 미국 50개주 중 42개주가 제조물책임 사건에 대해 엄격책임을 적용하고 있다.
유럽연합(EU) 또한 지난 2022년 9월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내용의 제조물책임지침 개정안을 채택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피해자가 ▲제조업자가 피해자가 요청한 관련 증거를 공개하지 않았거나 ▲제조업자가 EU법 등에 규정된 안전요건을 준수하지 않았거나 ▲제품의 결함이 명백한 오작동에 의해 발생한 경우 중 하나의 사실만 증명해도 제조물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피해자가 기술적·과학적 복잡성으로 인해 제품의 결함, 또는 결함과 손해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면 피해자가 ▲손해가 제조물로 인해 발생했거나 ▲제조물에 결함이 있고, 해당 결함이 손해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해도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내용도 개정안에 포함됐다.
◇ 22대 국회, ‘도현이법’ 입법 전망은?
도현이 법 재청원이 여론의 지지를 얻은 만큼 22대 국회에서도 제조물책임법 개정 논의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난 21대 국회에서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을 발의했던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달 중 개정안을 다시 발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입증책임 전환 시 소송 증가 및 영업비밀 유출 등 기업의 부담이 가중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작지 않은 만큼, 실제 법안 제정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21대 국회 정무위원회 검토 자료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와 법무부는 당시 “피해자의 주장만으로 요증사실 전반에 대한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입법례는 드물며, 산업계에 미치는 부담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또한 소비자 입증책임을 제조사에 전환하면 필요한 분쟁과 소송 남발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밝힌 바 있다.
한편, 보고서를 작성한 최은진·임병화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자동차라는 고도의 기술력이 집적된 제조물의 특성상 통상적으로 결함 외 다른 외부적 원인이 개입되어 손해가 발생하였는지 여부 등을 피해자가 파악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라며 “증거공개 요청권’은 제조업자에게 편중된 정보를 획득하여 손해에 대한 적용 등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소송에 필요한 입증자료를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증거공개 요청권’을 가능하게 하는 경우, 제조업자의 영업비밀과 관련된 자료보호의 권리와 상충될 수 있다는 점, 제도의 남용으로 인한 사업의 효율적인 운영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 등도 형평성의 측면에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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