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올해 들어 강력하게 주식시장의 ‘밸류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오히려 이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특정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훼손하는 시도가 반복되고 있는 만큼,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입법 논의가 시급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앞서 고려아연은 지난 30일 일반공모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했다. 신주 373만2650주를 주당 67만원에 발행해 약 2조5000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다.
현재 영풍·MBK 연합과 경영권 분쟁 중인 고려아연은 최근 3조2245억원 규모의 자기주식 공개매수를 진행하면서 메리츠증권·하나은행·스탠다드차타드은행 등에서 약 2조7000억원을 빌린 바 있다. 공개매수 자금 대부분을 급하게 빌린 차입금으로 조달한 만큼 이자 부담도 상당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고려아연의 부채비율이 상반기 말 기준 36.5%에서 공개매수 후 90%대까지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고려아연은 이러한 건전성 리스크를 해소하기 위해 유상증자로 조달한 자금 대부분을 차입금 상환에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고려아연의 갑작스러운 유상증자 발표에 기업가치나 일반주주의 이익보다는 최윤범 회장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유상증자를 통해 영풍·MBK의 지분가치가 희석되는 반면 최 회장의 경우 우군을 통한 추가 지분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
실제 고려아연은 신주의 20%를 우리사주조합에 우선 배정하고, 공모주식의 3%를 초과해 청약할 수 없도록 제한을 걸어뒀다. 영풍·MBK 연합과 달리 우리사주조합과 베인캐피탈, 한화, 한국타이어, 한국투자증권, 현대차, LG 등 다수의 우호세력을 갖춘 최 회장 입장에서는 이번 증자를 통해 지분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게 된 셈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반 주주의 피해가 급격하게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고려아연이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한 지난 30일 고려아연 주가는 하한가를 기록하며 154만3000원에서 108만1000원으로 29.94% 하락했다. 오늘(31일)도 고려아연 주가는 전일 대비 8만3000원(△7.68) 하락한 99만8000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개인투자자들은 최 회장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빌린 돈을 주주들에게 모금해 갚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한 투자자는 “이건 사기가 아니라 강도”라며 “이러나 국내 증시에 투자하면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곳”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투자자도 “국내 가치투자자들이 1픽으로 꼽았던 고려아연이 오히려 가치투자자들의 뒤통수를 쳤다”라며 “국장을 회의적으로 볼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사건이 될 것”이라고 쓴소리를 남겼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기업가체 제고(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 중인 상황에서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계획은 이를 역행하는 조치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31일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계획에 대해 “차입을 통해 89만원에 자사주를 매입하고 유상증자 통해 67만원(예정가)에 주식 발행하는 자해전략”이라며 “‘밸류파괴’하는 자본시장 교란행위”라고 비판했다.
포럼은 이어 “회사의 주인이 (전체)주주라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라며 “이는 고려아연 일개 기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울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고 덧붙였다.
국내 기업이 정부의 밸류업 시도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고려아연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두산그룹이 두산밥캣을 두산에너빌리티에서 분할해 두산로보틱스의 완전자회사로 편입시키는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하다가 강한 비판 여론에 직면한 바 있다. 알짜 계열사인 두산밥캣을 뺏기게 된 두산에너빌리티 주주는 물론, 적자회사 두산로보틱스로 편입시키면서 주식교환비율도 불리하게 적용해 손해를 보게 된 두산밥캣 주주들까지 불만이 폭발한 것. 이 때문에 금융당국까지 ‘증권신고서 무한 정정’을 언급하며 두산의 지배구조 개편에 개입해 제동을 걸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국내 기업이 일반주주의 이익을 훼손하려는 시도에 제동을 걸 방법이 없다는 회의론도 나온다. 실제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지배구조 개선 토론회에서 과거 선배들에게 국내 대기업에 투자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며 “대주주의 사익 편취 방법은 너무나 많은 반면 주주로서 부당함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일반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다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참여연대는 최근 논평에서 “그동안 시민사회가 주장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법제화는 ‘이사회는 재벌총수일가나 지배주주만의 이익을 위해 의사결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경제민주화 의제”라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이어 “정부는 겉으로는 ‘코리아 밸류업’을 외치면서, 정작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인 후진적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라며 “정부는 이미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에 의지를 보였다. 국민의 신뢰를 배신하지 말고 끝까지 책임감 있게 실효성 있는 상법 개정을 추진하라”고 촉구했다.
임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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