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리아] 한·일 3명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문학과 자국에 대한 인식
가와바타 야스나리 1968년 ‘아름다운 일본의 나’
오에 겐자부로 1994년 ‘애매한 일본의 나’
한강 2024년 ‘빛과 실’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한강이 지난 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자신의 글쓰기 과정과 작가로서의 성장 등에 관한 내용의 수상자 강연을 진행했다. ‘빛과 실’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한강은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하기 위해 일기와 시를 쓴 공책을 담았던 낡은 신발 상자를 최근에 발견했다는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그 공책에 ‘사랑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하는 금실이지’란 문장이 있었다며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그런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한강은 이날 『채식주의자』에서 최신작인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삶과 죽음, 폭력과 사랑 등 근원적 주제에 대한 끊임없는 고뇌를 청중들에게 들려줬다. 한 작가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폭력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질문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살다가 그 질문의 끝에 다다를 때 하나의 소설이 완성된다”며 “그 폭력이 담고 있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힘은 인간 사랑에서 온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폭력은 인간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폭압적인 힘이기도 하고, 5월 광주와 제주 4·3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들어온 현대사의 폭력이기도 하다.
한 작가는 “2012년 소설 『희랍어 시간』을 발표한 뒤엔 삶을 껴안는 밝은 소설을 쓰려고도 애썼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서가에서 우연히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발견했을 때 껴안은 질문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그 사진집엔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하다가 잔혹하게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이 담긴 사진과 총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피를 나눠주기 위해 병원 앞에 끝없이 줄을 선 사람들의 사진이 실려 놓였다. 인간의 상반된 모습이 담긴 이 사진들을 본 한강 작가가 품은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고통스런 질문에 빠져들면서 한강은 밝은 소설을 쓰는데 매달릴 수 없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은 ‘말로 듣는 문학’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세계인들이 주목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수상 연설에서 자국의 문학과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 오에 겐자부로(1994년), 한강(2024년) 등 3명이다. 첫 수상자인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그 서설”이란 제목으로 수상 연설을 했다. 당시 일본은 전후의 폐허에서 일어서서 국민총생산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올라선 데다가 1964년 도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국가적 자부심이 대단했다. 게다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함으로써 국가적인 역동성이 흘러넘쳤다. 노벨수상자들은 일반적으로는 연미복을 입었지만, 가와바타는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훈장을 단 하카마를 입고 연단에 서서 수상 강연을 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강연은 수상에 이르는 과정을 작가의 체험이나 자신이 살았던 나라의 역사를 중심에 놓고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가와바타의 연설문에는 그런 내용은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선종에 우상숭배는 없습니다. ‘아(我)’를 없애고 ‘무(無)’가 되는 겁니다. 그 ‘무’는 서양풍의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만유(萬有)가 자재로 통하는 공(空), 무애무변(無涯無邊), 무진장한 마음의 우주입니다. 심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이며 ‘언외(言外)’에 있습니다”라며 일본의 전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연설은 ‘아름다운 일본’과 그 안에 속한 자신의 합일성을 강조했다. 가와바타는 불교, 선종, 자연과의 합일, 동양화, 도자기, 차도 등 전통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연설문 끝자락에서 헤이안시대를 언급했다. “당나라문화를 흡수해 일본풍으로 잘 소화해, 약 천년 전에 화려한 헤이안 문화를 낳아 일본의 미를 확립한 것은 ‘특이한 등꽃’이 핀 것과 비슷한 이상할 정도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연설에서 강조한 일본의 전통과 아름다움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그가 말한 과거 일본의 아름다움은 주체성을 상실한 전후 일본의 사회상에 대한 비판이며, 그가 미적 기준으로 제시한 ‘아름다운 일본’은 이제는 파괴된 전후 세계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곽형덕 명지대 교수는 이것을 “가와바타가 패전 이후 고전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 것은 현실의 ‘추악함’으로부터 회피해 문학 속에 구축한 이상향”이라고 파악한 바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1994년은 동서 냉전체제가 해체된 이후 일본의 구 식민지였던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식민지 지배의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는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기였다. 오에는 영어로 한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애매한 일본의 나(Japan, The Ambiguous, and Myself)’에서 가와바타의 연설문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패러디하면서 일본의 모호성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했다.
오에는 “26년 전 일본 작가로서는 최초로 이 장소에 섰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라는 강연을 했다. 그것은 극히 아름답고, 또한 극히 애매한 것이었다”고 선배작가를 예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전에 빠져든 그를 비판하면서 아시아인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했다. 그는 가와바다를 “이 뛰어난 예술가가 만년에 도달한 솔직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노스탤지어와 함께 떠올린다. 소설가로서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가와바타는 ‘아름다운 일본과 나’에 대해 말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것은 가와바타 개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눈을 돌리고, 과거를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잊으려 하는 일본 사회의 역행에 대한 일침이었다. 오에는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일본을 선택한 가와바타와 달리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기억하는 작가로서, 이를 외면하는 ‘애매한 일본’을 전면에 내세워 비판한 것이다.
오에는 메이지유신(1868) 이후 일본의 근대를 아시아에 속하면서 아시아를 멸시하고, 서양을 따라 하면서 전통문화를 확고히 하는 ‘애매모호함의 양극’으로 파악했다. 오에는 일본인의 그런 양극단의 의식이 “아시아에서 침략자의 역할을 하도록 내몰았다”며 “아시아에서 일본군대가 자행했던 비인간적인 행위를 속죄하고, 그 바탕 위에서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일본의 사죄나 아시아와의 연대는 일본 사회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그대신 일본 사회는 오에의 문학을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 히카리(光)를 그린 인간승리의 사소설로 수렴했다.
패전 이후 일본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일본’을 추구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전후 작가로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접적으로 말한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은 방향이 매우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이들의 강연을 유사한 것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수렴했다.
2024년 한강의 수상연설 ‘빛과 실’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의 언어를 찾는 순례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공책에 썼던 시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를 언급하며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 그걸 잇는 금(金)실- 빛을 내는 실”이 자신의 근본적인 문학 언어임을 말했다.
그 시를 쓴 후 14년이 흘러 한강은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고, 그 이듬해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쓰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다시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첫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1년, 길게는 7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작가의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되었다. 작가는 그 점을 좋아했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했고,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러 살았다.
친절할 만큼 자신의 소설 세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한강은 ‘광주 사진첩’을 본 이후 한번도 풀린 적 없는 그 의문들을 다시 만나며 한국 현대사에서 있었던 비극에 대해 본격적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래전에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수수께끼를 대면하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글쓰기로만 그 의문들을 꿰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질문하고 써나가면서 어느 순간 그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질문이 이렇게 바뀌었다면 아마도 그 해답은 상당 부분 작품 속에 들어있을 것이다. 한강은 연설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주철현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는 한 칼럼에서 “공산품이 십년의 상품이고, 과학기술이 백년의 상품이라면, 문화는 천년의 상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한겨레신문 2024.11.1.) 상품의 측면에서 말하더라도 그만큼 노벨문학상의 가치가 크다는 것이다. 그런 문학과 문학상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국가의 문화와 상품에도 부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일본은 전혀 다른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을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끌어들여 수상의 영예를 높이며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우리는 어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뉴스가 나오자마자 터져 나왔던 이상한 주장들, 예를 들면 다른 나라 작가에게 상을 줘야 한다거나, 스웨덴대사관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정부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하거나, 노벨문학상 수상을 폄훼하는 일부의 헛소리에 흔들리지 말고 국가적 지원과 보호를 통해 더욱 큰 미래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임순만 작가 · 언론인 (전 국민일보 편집인)
임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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