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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임순만 칼럼] 한국 사회 좌·우 분열의 뿌리

by 이코리아 티스토리 202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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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리아] 한국은 태극기의 힘이 아주 큰 나라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태극기 사용을 금지했지만, 1919년 3·1만세운동 때 일제에 도륙되면서도 한국 민족은 남녀노소 누구도 손에서 태극기를 놓지 않았다. 일본군은 이를 끝까지 막아내지 못했다. 이후 태극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국기로서의 정통성이 계승되었고, 광복될 때까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몇 년 전부터 태극기가 극우단체의 광화문 시위에 이용되면서 좌우를 넘어선 범국민적 애국 운동의 상징으로 사용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 태극기는 하나 된 민족의 표상으로 작용했고, 그 힘은 수십만 대군보다 앞선다.

이렇게 태극기라면 하나가 되었던 한국 사회에 좌우 대립이 너무 심하다. 사회가 온통 대립으로 가득 차 있다. ‘비상계엄’과 같이 대형 사안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그 사안의 심각성으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좌·우나 보·혁 대결로 보는 ‘병든 사회’의 조짐을 보인다. 이렇게 한국사회에 좌우 대결이 뿌리를 내린 것은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이다. 미 군정기 한국 점령군 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가 제시한 이념적 정치적 기준은 한국인 정치세력을 구분하고, 한반도의 정치지형을 재편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는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잣대를 들이밀어 국내 정치를 파악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 내부의 좌우 대립 구조가 산출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대립은 국제적인 냉전과 결합되었다.

하지는 주한 미 전술군 사령관이자 입법·사법·행정 일체의 권한을 가진 미군정 사령관이었다. 미군정은 정부의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군사령관 예하에 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지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해방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사무치는 역사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조선을 공부할 시간도 의지도 없었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야전 군인이었다. 세계적 명성만이 아니라 점령 현지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까지 갖고 있던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독일 점령군 사령관 클레이(Lucius D. Clay), 이탈리아 점령군 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와는 격이 달랐다.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 점령 초기에 군대와 재벌을 해체했고, 농지개혁을 단행했으며, 노동조합과 공산당, 사회당에도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는 등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했다. 이것은 일본이 민주화할 수 있는 정치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클레이는 서베를린의 공산화 위기를 막는 데 기여했다. 클라크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이탈리아 주둔 미군 최고사령관으로 활동하며 1944년 6월 로마로 입성해 적국 수도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퇴각하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은 하지는 야전군 지휘관의 감각으로 한국을 이해했고, 출발부터 군사작전의 연장선에서 한국정치에 개입했다. 그는 남한 점령의 목적을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주의와의 대결의 일환으로 간주했고, 진주 이래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기꺼이 공산주의와 싸웠으며, 그 싸움은 공산주의에 한정하지 않은 채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국가수립 열망과 도처에서 충돌했다.

그 이전에도 한국 사회에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천황제 파시즘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의 노선상의 분화에 불과했다. 조선인들은 신간회 결성 등 민족통일전선을 통해 그런 대립을 극복한 경험이 있다.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1878~1951)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제 식민지 시기의 좌우는 일제에 대한 비타협이나 타협이냐를 의미했을 뿐이다. 그러나 신탁통치 논쟁을 거치면서 한국에서는 좌우 대립 구도가 자리 잡았고, 그 좌우 대립은 한국 사회 내부의 정치적 견해차를 반영한 것이라기보다 미소 대립의 연장이요, 외세 입김의 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외세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일부 정치세력에 의해 한국 사회에 폭력적으로 강요된 대립이었다.

정용욱 교수(서울대)는 저서 『존 하지와 미국 점령통치 3년』에서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구도를 미국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재편한 것이야말로 미군정 3년이 한국에 남긴 가장 큰 ‘부(負)의 유산’이라고 말한다. 하지가 정치를 공작과 군사작전의 차원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는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지 못하고 있던 1945년 11월 2일 참모회의 석상에서 “김구는 스튜에 필요한 소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 군정기 3년 동안 김구를 자신이 끓이는 스튜에 간을 맞출 소금 이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김구가 누구인가. 그는 흔들리고 와해 직전에 있던 임정을 일으켜 세우고 이끌어나간 민족 최고의 지도자였다. 안창호 이동휘 이승만 등 초창기 임정의 지도자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떠나자 거미줄이 늘어가던 임정을 눈물과 고집과 끈기로 세우고 광복군을 창립해 독립운동의 젖줄을 댄 사람이었다. 그런 지도자를 국에 넣을 소금 정도로 인식한 하지의 한국 이해력은 끝내 비극을 불렀다. 그는 독립을 향한 열기를 분출하는 한국인들을 폭도 정도로 간주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이를 선동한다고 보았다.

완강한 반탁진영이었던 김구와 임정은 결국 분단이 현실화하는 가운데 민족통일세력으로 탈바꿈했다. 또 좌우합작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김규식 역시 최종적으로 하지의 과도정부 수립구상과 결별하고 한국인의 자주적인 통일정부 수립 운동에 몸을 실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1948년 남북협상회담을 위한 북행은 하지의 남한 점령통치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 교수는 이런 하지의 점령정책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우파였다고 파악한다.

현재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12·3비상계엄으로 드러난 부작용의 원인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폭압정치 외에도 ‘대통령제’ ‘양극화’ ‘포퓰리즘’ 등을 꼽고 있다. 그 치유책으로 내각제, 양원제, 책임총리제 등 다양한 제도개선책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보수와 진보의 강경 시위가 일상화되다시피 하고, 음모론적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개헌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고, 개헌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지금 외교·경제 전략, 불평등 완화 방안, 젠더 정책, 기후변화 대응과 같은 주요 정책 의제가 공론장에서 사라진 사회에서 호흡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 국제적 복합위기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발생한 국내 정치 위기로 말미암아 한국이 과연 제대로 대응할 능력이 있는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 사회는 모든 에너지를 좌·우대결에 쏟아붓고 있을 뿐이다. 누가 그 힘든 정책을 들여다보고 있는가? 누가 이 위기에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워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가?

 

 

 

임순만 작가 · 전 국민일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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