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리아] 2025년 올해는 을사늑약 12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이코리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한다.
3월 기준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1만8162명 중 재외동포를 재외한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76명에 달한다. 중국인이 34명, 미국인이 21명으로 가장 많으며 캐나다, 영국, 호주, 프랑스, 러시아 등 세계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외국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과 조명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1995년 8월에는 해방 후 처음으로 외국인 독립유공자를 위한 합동 추모식이 열렸지만 이는 일회성에 그쳤으며, 이들을 위한 추모 시설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코리아>는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호머 헐버트 선생, 후세 다쓰지 변호사 등 널리 알려진 외국인 독립운동가 외에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인물들을 살펴봤다.

= 국가보훈부 누리집
루이 마랭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유일한 프랑스인이자, 201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의 유력 정치가로서 1905년부터 1952년까지 총 5회의 장관직을 역임하고 12차례나 뫼르트에모젤 지역의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각 지역의 민속을 연구하던 루이 마랭 선생은 1901년 극동을 여행하던 중 한국을 방문한 뒤 '한국으로의 여행' 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마랭은 한국을 "극동의 프랑스이며, 한국인은 순수하고 친절하다."라고 평가했다.
1919년 한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프랑스 의회에서 일본의 탄압을 조사할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인권운동가 펠리시앙 로베르 샬레(Felicien Robert Challaye)를 서울로 파견해 일제의 만행을 조사하도록 했다. 또 1921년 6월 한민족 독립 지원을 위해 파리에서 프랑스 지식인들로 구성된 '한국친우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후 일본과 독일의 침략 및 식민 지배를 규탄하는 의회 보고서를 11차례 작성했고, 1919년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파리위원부를 설치하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2차대전 발발 이후에는 나치의 괴뢰정부에 저항하는 프랑스 내무부대 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으며, 1944년에는 게슈타포에 쫓겨 런던으로 건너갔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 프랑스로 귀환한 마탱은 이후 정계와 학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1960년 5월 23일 파리에서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프랑스 특파원이었던 서영해는 그를 "프랑스의 고귀한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으며, 광복 후 프랑스를 떠나면서 선생에게 “한국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한국을 도운 분”이라는 내용의 감사 서신을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롤랜드 클린턴 베이컨 대위는 선교사이자 영국군 장교로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전사한 캐나다인 독립운동가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캐나다 국적자로서는 1968년 이후 52년 만의 독립유공자 지정이었다
베이컨 대위는 1931년 캐나다 선교사의 딸과 결혼하면서 한국으로 건너와 선교사이자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함경남도 함흥에서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당시 한국인들에게 교육과 종교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일본의 종교 탄압이 심화되면서 그의 가족은 1941년 강제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고, 캐나다로 돌아가는 대신 인도로 향했다. 이후 그는 영국군 특수작전국(SOE)에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다.
1943년 10월부터 1944년 9월까지, 베이컨 대위는 인도 주재 영국군 소속 장교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와 긴밀히 협력했다. 그는 일본군 포로 심문 및 문서 번역, 라디오를 통한 심리전, 일본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선무공작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한국어와 영어 모두 가능하다는 점을 살려 광복군과 영국군 간의 정보 전달을 담당하며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45년 3월 11일, 베이컨 대위는 미얀마 만달레이 전투에서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는 급작스러운 일본군 총격에 대응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 공격의 근원지를 확인하던 중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으며, 병원으로 후송된 지 이틀 후인 3월 13일 광복을 5개월 앞두고 전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 독립을 위해 광복군과 함께 싸운 베이컨 대위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72번째 외국인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아들 휴 베이컨(Hugh Bacon)이 2020년 한국 정부로부터 부친을 대신해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 선생은 부산 일신여학교의 교장으로서 3·1운동 당시 학생들의 만세 시위를 이끈 호주인 독립운동가다. 202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호주 빅토리아주 알란스포드 출신인 데이비스 선생은 1910년 12월 선교사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여성 교육에 헌신하며 1911년부터 시원여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1916년부터는 호주 장로교가 운영하는 일신여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된 이후, 일신여학교의 교사 주경애는 부산상업학교와 연락을 취하고,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전파했다. 1919년 3월 10일,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 11명은 기숙사 벽장에서 태극기 50매를 직접 제작했고, 기숙사 감독 이사벨라 벨레 멘지스는 태극기 제작 재료를 제공했다.
다음 날인 3월 11일,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 김응수를 비롯한 학생들은 교사들과 함께 부산 좌천동으로 이동해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교장 마가렛 데이비스와 교사 데이지 호킹은 직접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된 데이비스 선생과 호킹 선생은 3월 13일까지 부산진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지만, 외교 갈등을 우려한 일제는 불기소 처분을 내리고 석방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는데, 1940년대 일본은 기독교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에 호주 장로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 운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데이비스 선생은 1940년 3월, 일신여학교가 폐교되면서 호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데이비스 선생은 호주에서 생활하다 1963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의 공로를 기려 2022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같은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학생감독 이사벨라 멘지스, 선교사 데이지 호킹과 시위에 참여했던 일신여학교 학생 12명도 독립유공자로 함께 서훈되었다.
※참고자료
- 공훈전자사료관 누리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보훈부
- 캐나다 전쟁유산협회 (Wartime Heritage Association) 누리집 (http://www.wartimeheritage.com/)
- 도면회. (2020). 한국 독립운동과 외국인 독립유공자. 인문논총, 77(2), 13-46.
현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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