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존재감을 키워온 행동주의 펀드가 올해 주주총회에서는 이사회 진입을 노리는 중장기적 관점의 투자전략으로 선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업들은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무방비하다며 경영권 방어수단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주주권익 강화 차원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역할이 더욱 확대돼야 한다는 반론도 나온다.
◇ 이사 선임에 집중한 행동주의 펀드, ‘중장기 주주가치 제고’로 전략 선회
의결권 서스틴베스트가 지난 17일 발표한 ‘2024 정기주주총회 리뷰’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정기 주총에서 주주제안 안건을 상정한 상장기업 수는 총 34개, 안건 수는 117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44건)보다는 감소한 것이지만 2022년(27건)보다는 높은 수준으로, 최근 주주제안 활성화 추세를 보여주는 수치다.
실제 34개사 중 18개사의 주주제안은 일반주주에 의한 것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한미사이언스, 다올투자증권 등 9개사에서는 경영권 분쟁과 관련된 주주제안이 상정됐으며,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도 7개사 주총에 상정됐다.
올해 행동주의 펀드 주주제안에서는 이사회 진입을 통한 중장기적 투자로의 변화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117개 주주제안을 유형별로 나눠보면 ‘이사·감사 선임’이 61건(52.1%)으로 가장 많았는데, 행동주의 펀드가 발의한 주주제안도 대부분 이사 선임에 집중됐다.
실제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태광산업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1명, 사외이사 2명에 대한 이사 선임 안건을 주주제안했으며, JB금융지주 2대주주인 얼라인파트너스도 비상임이사 1명, 사외이사 4명을 후보로 추천했다. 특히, 얼라인파트너스의 경우, 지난달 28일 열린 JB금융 주총에서 김기석·이희승 후보가 사외이사로 선임되면서 이사회 진입에 성공했다. 특히 김 후보의 경우 국내 금융지주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추천으로 사외이사가 선임된 첫 번째 사례다.
서스틴베스트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이사 선임 주주제안은 배당 확대와 같은 일회성 요구보다 이사회 진입을 통해 좀 더 중장기적 관점으로 주주가치 상승을 이끌어내려는 접근법의 변화로 해석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집중투표제 또한 행동주의 펀드의 목표 달성에 기여한 요인으로 꼽힌다. 집중투표제는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1주마다 선임 예정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고, 의결권을 특정 후보에게 집중 투표하거나 여러 명에게 나눠 행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1주 1의결권인 경우 대주주가 선호하는 이사가 선임되는 경우가 많지만, 선임 예정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이 보장되면 일반주주가 원하는 이사가 선임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실제 올해 주총에서는 KT&G와 JB금융이 집중투표제를 도입했는데, KT&G는 이를 통해 2006년 후 처음으로 외부 추천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했으며 JB금융에서도 얼라인 측 추천 인사가 이사진에 합류하게 됐다. 서스틴베스트는 “집중투표제는 경영의 투명성 강화 및 일반주주의 권익 향상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판단된다”라면서도 “일부 외국인 주주의 집중투표 표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논란이 제기되고 있어, 제도 운영 관련 정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서스틴베스트는 이어 “향후 국내 상장기업에 대한 주주제안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며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스튜어드십코드 가이드라인 개정 등으로 인해 소액주주 참여 및 행동주의 펀드의 캠페인이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 한경협, “행동주의 경영권 위협 확대될 것... 기업 방어수단 제도화해야”
한편 향후 행동주의 펀드의 활약을 중심으로 주주제안이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기업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법무법인 광장에 의뢰해 작성한 ‘주주행동주의 부상과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국내 기업 수는 2019년 8개에서 지난해 77개로 5년 연속 증가하며 10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는 일본(68개→103개), 미국(543개→550개) 등 다른 국가들의 증가폭을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김수연 광장 연구위원은 “국내에서는 주가 부양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들이 사실상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경영권 방어수단인 자사주마저 소각을 강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펀드의 주장이 관심을 받고, 국내 기업이 적대적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방어제도 도입 논의는 답보 상태”라며 “우리가 기업 밸류업 제도를 벤치마킹한 일본은 감사위원 3% 제한 및 분리 선임과 같은 제도를 운영하지 않는데다, 이미 20년 전 적대적 인수 방어 수단인 포이즌 필(poison pill)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어 “앞으로 국내 주주행동주의는 배당을 늘리거나 분리 선출되는 감사위원인 이사를 선임하는 수준을 넘어 경영권 위협 내지 적대적 인수 시도까지 확장되며 우리나라 기업들에게 주요 경영 위험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며 “지배주주 견제와 감시 프레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업이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하고 가치를 제고할 수 있도록 균형 있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주주행동주의 기관, 기업 및 유관단체, 시장전문가 등과 함께 간담회를 열고 상생·발전을 위한 행동주의 기관 및 기업의 협력을 당부했다.
이 원장은 행동주의 기관에 대해 “단기수익만을 추구하는 무리한 요구는 기업의 장기 성장동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자본시장 발전에도 장애물이 될 수 있다”라며 “주주행동주의 기관은 ‘장기 성장전략’을 기업과 주주들에게 적극적으로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기업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요구 등 다양한 활동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라며 “주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주주의 정당한 요구에는 적극 소통해 주시길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임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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