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혼 소송 항소심 판결로 긴급 대책 회의를 연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3일 SK그룹 사내 포털망에 ‘구성원에 편지’로 사과했다.
11일 재계에 따르면 최 회장은 사내 편지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국내외 사업 현장에서 촌음을 아껴가며 업무에 매진하는 구성원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며 "개인사에서 빚어진 일로 의도치 않게 걱정을 안겨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어 최 회장은 "이번 가사소송 판결은 우리 그룹의 역사와 근간을 부정하고 뒤흔들었다. 지난 71년 간 쌓아온 SK 브랜드 가치, 그 가치를 만들어온 구성원의 명예와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최 회장은 "그룹과 구성원의 명예를 위해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상고심에서 반드시 곡해된 진실이 바로 잡힐 수 있도록 하겠다"며 "그동안 SK를 거쳐간 수십만 선배 구성원이 힘겹게 일궈온 성장의 역사가 곡해되지 않도록 결연한 자세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SK 한 직원은 "부디 하시는 일이 잘 풀리시길 바랍니다"라며 "저는 제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다"라고 응원했다. 또 다른 직원도 "멀리서나마 응원한다"며 "SK그룹의 역사와 명예를 바로 세워달라"고 댓글을 달았다.
이처럼 이혼소송 항소심 결과에 직원들이 응원을 보내는 것은 SK그룹의 성장사를 부정한 판결 내용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최 회장 개인 문제에서 그룹의 명예를 훼손하는 문제로 비화되면서 구성원들의 동요가 있었고, 최 회장의 단호한 대처를 응원하게 됐다는 것이다.
앞서 서울고법 가사2부는 지난 5월 30일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금 1조3808억원과 위자료 20억원을 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SK 선대회장의 보호막이나 방패막이 역할을 하며 결과적으로 (SK그룹의) 성공적 경영 활동에 무형적 도움을 줬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SK그룹 관계자들이 재판부의 판결에 의아함을 나타내는 부분은 재판부가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로 유입됐다고 인정한 대목이다.
최 회장도 이동통신사업 진출에 대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방패막이 삼은 특혜가 아닌 철저한 준비와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2년 다른 경쟁 후보들을 압도하는 최고 점수를 얻어 제 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했으나 일주일 만에 사업권을 반납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각에서는 이번 2심이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과 최태원 회장 부자가 일궈낸 M&A(기업 합병) 경영 업적을 무시한 판결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최종현 회장은 자본, 기술, 인재가 없었던 1973년 당시 선경(현 SK)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했다. 장기적 안목과 중동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해 1983년부터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뚝심있게 사업을 추진,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최종현 회장은 미래설계가 그룹 총수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운 이후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고 미국 ICT 기업에 투자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해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이런 노력 끝에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지만 특혜시비가 일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최 회장은 그러면서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고 임직원을 설득했다. 최종현 회장은 실제로 2년 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주당 8만원 대이던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하자 주변에서 재고를 건의했지만 최종현 회장은 "이렇게 해야 나중에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최종현 회장이 항상 10년을 내다보고 준비한 끝에 SK를 직물회사에서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을 아우르는 그룹으로 성장시켰다면 장남인 최태원 회장은 2011년 하이닉스 인수 등을 통해 반도체와 바이오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 인수 직후 "하이닉스가 SK 식구가 된 것은 SK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을 실현하는 의미가 있다"며 30년 전 선친의 못다 이룬 꿈을 언급했다. 1978년 미래 산업의 중심이 반도체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선경반도체를 설립했으나 전 세계를 강타한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어야 했던 과거를 회상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1998년 취임할 당시 SK그룹은 매출 37조4000억 원, 순이익 1000억 원, 재계 순위 5위였으나 취임 24년 만인 지난 2022년 현대자동차그룹을 제치고 SK그룹을 국내 재계 서열 2위에 올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최근 최태원 회장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축으로 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SK하이닉스 등 그룹 주요 계열사 주가가 급등했다.
또 최태원 회장은 국내 대기업 총수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ESG경영을 사업모델에 적극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탄소배출 감축 등 세계적 환경위기 해결 노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SK그룹은 에너지, 정보통신에 이어 반도체까지 3개 사업이 중심축이 됐다. 모두 최종현 선대회장과 최태원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서 거둔 성과다.
앞서 최 회장은 3일 서울 SK서린사옥에서 열린 임시 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도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SK가 성장해온 역사를 부정했다며 유감을 표한 바 있다.
아울러 최 회장은 "이번 판결의 파장으로 많이 힘드실 줄 알지만, 저와 경영진을 믿고 흔들림 없이 업무와 일상에 전념해 주시길 부탁한다"며 "저부터 맨 앞에 서서 솔선수범하겠다. 다시한번 구성원 모두에게 저의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라고 밝혔다.
최 회장은 향후 상고를 통해 진실규명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SK그룹의 많은 구성원들도 상고심을 통해 자긍심이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윤수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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