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며 한국 배터리 업계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해왔다. 특히 배터리 및 친환경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첨단 제조 세액공제(AMPC) 축소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8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업계가 좀처럼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IRA상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AMPC는 특정 기업이 미국에서 첨단 제조기술을 활용해 배터리나 태양광에너지 등 친환경 제품을 생산할 경우, 세액 공제의 형태로 혜택을 해당 기업에게 제공하는 제도다. 이에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한국 배터리 3사도 이 혜택을 통해 수익을 유지해왔다. 올해 3분기까지 이들 기업이 누적한 AMPC 규모는 1조3788억 원에 달하며, 이는 3사 영업이익의 2배 이상이다.
현재 LG에너지솔루션의 조지아 현대차 합작공장과 오하이오 혼다 합작공장, SK온의 켄터키주 공장 등이 가동을 앞두고 있어 AMPC 의존도는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또 북미에 생산 기지가 없는 삼성SDI는 상대적으로 AMPC 수혜 규모가 작지만, 이르면 4분기 말 북미 스텔란티스 합작법인(JV) 공장 가동을 앞두고 있어 내년부터 수혜액이 순차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AMPC 축소 시 배터리 업계는 적자에 직면할 수 있어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재집권으로 인해 전기차 보조금 축소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업계는 북미 시장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ESS(에너지저장장치) 등 다른 배터리 수요로의 포트폴리오 확장을 검토하고 있다.
일부 트럼프 당선인의 중국을 겨냥한 관세 정책이 배터리 산업에 이득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무역협회가 지난 9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대중국 301조 관세인상 품목 대부분은 기존 301조 관세나 반덤핑・상계관세 등으로 인해 대중국 수입의존도가 이미 낮아 영향이 미미하나, 규제 수준이 낮았던 품목은 중국산 수입 비중이 감소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예컨대, ESS용 배터리는 기존 301조 관세가 7.5%에 불과하고 IRA FEOC 규정에서 자유로웠으나 최근 25%로의 관세인상으로 삼원계 배터리와 LFP 배터리 간 가격 차(약 27%로 추산70)가 상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LG에너지솔루션의 김동명 사장은 앞서 지난 1일 서울 강남 조선팰리스호텔에서 열린 '제4회 배터리 산업의 날' 행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AMPC 축소 가능성에 대비한 다양한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 사장은 이날 미 대선 결과에 따른 배터리 업계 영향에 대해서는 “생산자들이 받는 보조금(AMPC)에는 큰 변동이 없겠지만 소비자들이 느끼는 택스 크레딧은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모든 회사들이 그 시나리오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으니 잘 대응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사장은 또 “최근에 비전 선포식을 했고 저희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는 과정 중에 원통형이나 ESS 수주, 고객사 다양화를 말씀 드렸다”며 “곧 이렇게 계속 실행화되는 것들을 보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8일 <이코리아>와 한 통화에서 “EV 산업의 중장기적 성장 가능성은 변함없다”며 “미 대선 결과에 따른 정책 및 시장 변화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며 그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관계자는 “IRA 시행 이전부터 북미 시장을 핵심 전략시장으로 삼고 투자를 진행해왔다”며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 구조적 원가 경쟁력 확보 통해 IRA 수익에 의존하지 않는 사업 구조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북미공장은 캐파(capa) 속도 조절 및 가동률 극대화 등 ‘리밸런싱’ 작업가속화 및 애리조나 등 신규 생산거점은 순조로운 양산을 준비 중”이라며 “핵심 원재료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글로벌 주요 배터리 업체 중 FEOC 규정 등에 대한 대응력 면에서 확실한 경쟁 우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를 지속 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선진국의 캐즘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증권은 지난 8월 발표한 '중국 전기차 동향과 향후 전망' 보고서에서 “유럽과 미국은 상반기 전기차 판매 증가율이 각각 5.3%와 8.0%에 불과했다”며 “유럽은 ’20년 전기차 상용화 단계(전기차 침투율 10%)에 도달하였으나, ’25년 침투율이 25%, ’30년 45%에 머물 것이며 미국의 전기차 시장 성장속도는 이보다도 더디게 진행되어 전기차 침투율 20%에 도달하는 예상시점이 ’30년까지 지연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어 “유럽과 미국의 전기차 캐즘 현상은 공급 측면에서 전통 내연 자동차 중심의 강력한 공급구조, 수요 측면에서 편리성 부족, 전기차 인프라 구축 부진이 맞물린 것으로 상당 기간 전기차 세대교체가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트럼프 당선으로) 향후 전기차나 배터리에 대한 보조금은 없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라며 “전기차의 캐즘이 장기화되면서 생각 이상으로 배터리 산업의 영향이 가장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필연적으로 전기차는 가야 되고, ESS 활성화는 될 것이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으로 인해 고민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배터리 업계 전망과 관련해 트럼프가 당선되었지만 미국이 전기차 산업을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이창민 KB증권 연구원은 7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트럼프의 당선은 분명 긍정적인 뉴스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전기차와 2차전지 산업을 미국이 포기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과도하게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 연구원은 자율주행, 매몰비용, 머스크의 존재 등은 전기차 산업의 당위성이라면서 “가장 우려가 많은 IRA의 경우 이를 폐기하려면 상원과 하원 모두의 동의가 필요한데, 공화당 내에도 IRA 폐지를 반대하는 의원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전면적인 폐지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IRA를 통해 받은 혜택으로 산업 경기를 부양하고 있는 지역구 의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미국은 전기차 산업에 너무나도 많은 돈을 투자했다. 글로벌 비영리 환경단체인 환경방어기금(Environmental Defense Fund)에 따르면 2015년 1월부터 2024년 2월까지 지난 9년간 미국은 전기차와 배터리 생산 시설에 총 1880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 연구원은 또 “미국 자동차 업체들이 미국 내에서만 차량을 판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외 사업까지 고려할 경우 미국 기업의 전기차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국익에 위배되는 행동이며, 미국이 전기차를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자율주행”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테슬라와 머스크에 대한 주목도가 커지면서 관련 규제 완화 등 자율주행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자율주행에는 상당량의 전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율주행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전기차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수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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