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사를 읽고 있었다. 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해방직후사가 가장 복잡하고, 자료들이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시기라고 말한다. 일제 36년간 식민 지배를 겪고 해방이 되었다. 남북한에 여러 인물과 정파, 단체들이 중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미국 소련 중국 영국 일본 등 주변 열강의 이익이 첨예하게 얽혀 있으니 복잡할 수밖에 없다. 한 달 사이에도 보통 때는 1년이나 2년에 걸쳐 일어날 만한 중요한 일들이 집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해방 직후의 시기이다. 이승만은 이승만대로, 김구는 김구대로, 여운형은 여운형대로, 김규식은 김규식대로, 장덕수 송진우는 또 그들 나름으로 치열한 논리를 내세우며 미군정 하에서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다. 책 내용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때 이승만이 1946년 초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내세우며 정국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운형이 해방에 대비해 이미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자기 정치세력이 없었다. 그런 이승만이 구사하는 노련한 술수가 정국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의 플레이가 정국에 어떤 기류를 만들지가 당대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누가 누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어떤 단체를 통해 어떤 논리를 내세우는지, 누가 미군정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머리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마당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책의 저자는 지금까지 유지해온 역사 서술의 균형감을 잃어버리고 거의 욕설에 가까운 언어를 구사하며 이승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할 대목에서 저자는 개인의 호불호를 드러내며 집필의 이성을 잃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현저하게 책의 밀도가 떨어졌다. 저자가 집필의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면 독자들은 그 파격을 감당하지 못한다. 책은 더 이상 읽을만한 힘을 상실한다. 저자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품격을 잃고 도를 넘는 순간부터 책은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다. 나는 그 부분에 책을 덮었다.
지난 3월 28일부터 4·10 국회의원 총선거가 공식 선거 운동이 시작됐다. 13일간의 열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 거리의 집중 유세에서 “정치 자체는 죄가 없다. 정치를 개 같이 하는 사람이 문제”라며 “범죄자들이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30일에도 한 위원장은 부천 유세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이재명 대표 등에 대해 “쓰레기 같은 말”을 한다며 발언 수위를 높였다.
여기서 ‘정치를 개 같이 하는 사람’과 ‘범죄자’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나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지배한다는 말도 민주주의 상식으로 듣기에 불편한 말이다. 더 불편한 것은 ‘개같은 정치’ ‘범죄자’ 등의 혐오를 유발하는 발언이다. 우리의 형사소송법에서 ‘범죄자’는 “형사소송 절차에 따라 법원의 유죄 판결이 확정된 자”를 지칭하는 용어다. 형사소송의 피고인도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상 ‘범죄자’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상대당 대표를 향해 이런 식으로 막말을 하는 대표가 속한 당의 총선은 종합적으로 승리하기 어렵다. 당의 선거를 총괄하는 선대위원장이 지켜야할 권위와 품격과 책임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막말을 퍼붓는 순간 선거정국의 긴장과 밀도는 곤두박질치게 마련이다.
이번 총선은 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선거 운동 막바지에 집권당이 “개헌과 탄핵만은 막을 수 있게 표를 달라”고 호소할 정도로 열세적인 분위기 속에서 선거운동을 했고, 개표결과 참패를 기록한 경우는 우리 선거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여러 정치 평론가가 여당의 참패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여당 대표가 공식 선거운동 첫날부터 이렇게 막말을 하며 무너지면 이기는 선거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 순간부터 선거 정국은 기울어졌다고 봐야 한다.
총선은 각 당이 내세운 후보들의 총체적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유권자들이 그 역량을 선택하도록 하는 대의 민주주의 최고의 시험장이다. 그 총합으로 그 정당은 수권정당이 되기를 꿈꾼다. 당연히 입후보자들은 긴장되고, 자극적이기 십상이다. 선거판은 지지자와 비판자들의 들끓는 격동으로 모두가 흥분된 상태로 치닫는다. 자칫 오버하기 쉬운 위태로움으로 가득 차기 마련이다. 그런 현장에서 당의 사령탑은 선거전의 방향을 잡아줘야 하며, 중후한 지성의 최후 보루가 되어 많은 신선한 정치언어를 계속 공급해 줘야 한다.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대표가 먼저 막말로 상대당을 공격하면, 모든 후보가 알게 모르게 닮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정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막말과 비방의 언어가 소용돌이치게 된다. 일부의 지지자는 그런 말에 속 시원해할지 모르나 훨씬 위험부담이 크다. 그런 말에 속 시원해하는 사람은 이미 표의 확장성이 없는 사람이다. 정치 경험이 없는 검사 출신의 젊은 인사가 여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어 “여의도에서 300명(국회의원)만 공유하는 화법이나 문법이 있다면 그건 ‘여의도 사투리’가 아닌가”라며 “나는 나머지 5000만 명이 쓰는 언어를 쓰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가 구사할 새로운 언어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 한 위원장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새로운 내용보다는 송영길·이재명·조국 등 전·현직 야당 대표들에 대한 비난이 훨씬 많았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부정평가가 긍정평가의 두 배에 육박하며 김기현 대표 체제의 여당으로서는 총선 패배가 예상되던 상황에서 등장한 한 위원장을 향한 세간의 기대는 매우 컸다. 한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취임 후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잡음이 별로 없는 공천을 통해 원톱으로서의 입지를 쉽게 굳혔다. 그러나 그는 미래비전을 보여주기보다는 극복해야 할 과거 국민의힘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했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정치 신인이 출몰했고 그 유효기간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기대감을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국회는 사회 모든 분야의 갈등과 이해관계를 집약해 입법으로 수렴하는 대의 민주정치 최고의 기관이다. 깊은 공력 없이는 버티기 어렵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표로 곧바로 연결되는 선거철에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국민의힘에서 누가 어떻게 새로운 힘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정치의 제1차 기능은 언어에 있다.
임순만 작가 · 전 언론인(국민일보 전 편집인)
임순만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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