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 "영국보다 체코 등 동유럽 국가 원전사업이 더 유리"
한국전력(한전)이 영국 정부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방안을 협의 중이라는 외신 보도가 나온 가운데 <이코리아> 취재 결과 해당 사업 추진 배경에 몇가지 중대한 의문을 확인했다.
첫 번째 의문은 과거 일본 히타치 사가 영국정부와 원전 건설을 협의했으나 경제성이 낮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업을 종료했다는 점이다. 또 당초 히타치의 영국 원전 건설 사업의 동기가 정치권의 원전 수출 로드맵과 무관치 않았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일본의 원전 기업이 영국에 원전을 건설하면 다목적의 효과를 거둘 것으로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히타치는 벽에 부딪혔다. 해당 원전사업이 경제성이 낮다는 판단이 나온 것이다. 결국 히타치는 사업 포기 종료를 선언하게 된다. 히타치가 왜 경제성이 낮다는 결론을 냈는지에 대해선 국내 언론에서 상세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이코리아>가 해당 사안에 대해 일본 언론의 보도를 분석한 결과 아사히 신문에서 의미있는 분석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전과 영국 정부가 원전 사업을 협의 중이라는 사실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12일(현지시간)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한전이 영국 당국자들과 웨일스 앵글시 윌파 지역에 신규 원전을 짓는 문제와 관련한 초기 논의를 진행했으며, 이번 주 장관급 회의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한 영국 정부 당국자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앤드루 보위 영국 에너지안보·넷제로부 장관이 이번 주 한전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앞서 영국원자력청(GBN)은 지난 4월 일본 히타치로부터 윌파 원전 부지를 매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윌파 부지는 영국 내에서 대형 원전 건설부지로 최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과거 원전을 운영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웨일스 윌파 지역은 일본의 복합기업 히타치의 자회사 호라이즌뉴클리어파워가 2012년부터 원전 개발을 추진하다가 실패로 마무리된 곳이다.
앞서 제레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은 올해 3월 정부 예산안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히타치가 보유한 웨일스 윌파 지역 부지와 다른 지역 부지를 모두 합쳐 1억6천만 파운드(약 2749억 원)에 매입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미 미국 건설그룹 벡텔과 미국 원자력기업 웨스팅하우스 등 컨소시엄은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원자로 기술을 활용해 윌파 부지에 새로운 공장을 짓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영국 정부는 올해 1월 11일 현재 6기가와트(GW)인 원자력 발전용량을 2050년까지 24기가와트로 늘려 자국 전력 수요의 25%를 담당케하는 새로운 원전 로드맵을 발표한 바 있다.
영국의 원전 로드맵은 70년 만에 최대 규모로 추진되는 원전 확대 계획이다. 영국은 현재 건설 중인 '사이즈웰 C'나 '힝클리 포인트 C'와 같은 크기의 원전을 잉글랜드 동부에 올해부터 새로 지을 계획이다. SMR도 도입해 원전 비중을 현재 15%에서 2050년까지 25%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날 “원전 건설비용 증가와 공기지연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2030년부터 2044년까지 5년마다 1~2개의 신규 원전 건설 프로젝트가 승인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영국 수낙 총리는 원자력을 통해 2050년까지 넷 제로를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자국의 에너지 안보를 보장하고 경제 성장에 필요한 일자리와 기술을 창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전은 영국 원전 시장에 여러 차례 노크했다. 지난 2017년 영국 북서부 무어사이드 지역에 3.8GW 규모의 원전 3기를 짓는 무어사이드 사업 인수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당시 원전 사업권자였던 일본 도시바의 자회사 뉴젠 지분 100%를 인수해 원전 건설을 추진하려 했으나 무산됐다. 이듬해 도시바가 뉴젠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김동철 한국전력 사장은 지난해 11월 윤석열 대통령 국빈 방문을 계기로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웨일즈 지역의 버지니아 크로스비 보수당 의원 초청으로 윌파 원전 부지를 찾아 사업 여건을 살피고 한전의 사업 역량을 알렸다.
이어 지난해 11월 22일에 열린 비즈니스 포럼에서는 웨일즈 원자력 포럼 및 맥테크 에너지 그룹과 업무협약(MOU)을 맺어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다만,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는 영국 내 원전 건설은 어려운 일이라면서 한전의 부지 매입 가능성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의 원자력 생태계를 재건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기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건만 맞으면 영국에서 원자력 프로젝트를 확실히 할 수 있다”며 “그러나 우리 기업들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런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전력은 이에 대한 언급을 거부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보도했다.
두 번째 의문은 한전이 영국 원전 건설사업의 경제성을 충분히 따져봤는가 하는 점이다. 한전은 전기료를 인상하지 않으면 적자에서 헤어날 수 없는 구조다. 즉 경제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벌여서는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히타치가 2012년부터 추진해온 3조엔(당시 가치로 280억 달러) 규모의 호라이즌 프로젝트 사업을 그만둔 것은 다름 아닌 경제성 문제였다.
히타치는 지난 2020년 9월 공식성명을 통해 2019년 1월 중단된 영국 원전 건설 프로젝트(호라이즌 프로젝트)의 사업 운영을 종료한다고 밝혔다.
당초 호라이즌 프로젝트는 히타치가 영국 내 원자력 사업을 발전시켜 영국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기여함은 물론 일본 내 원자력 산업을 지원하는 사업 기반을 유지하겠다는 취지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히타치는 2020년 공식성명에서 “2019년 1월 민간기업으로서 경제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사업의 자금 조달 구조와 원자력 발전소 건설 및 운영 조건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재정 지원 방안과 관련한 영국 정부와 사업 요건 협의 과정에서 이견이 발생하자 비용 상승을 이유로 2019년 초 사업을 접은 것이다.
프로젝트 중단 요인으로는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안전기준이 강화되면서 예상 건설비용이 급등했던 것도 한 영향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 영국 정부도 히타치가 의존하던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일본 언론들은 지적했다.
아사히 신문은 2020년 9월 16일 히타치의 영국 원전사업 중단을 알리면서 “아베 정권이 추진한 경제성장 정책의 핵심 축은 원전 기술 등 인프라 수출이었다”며 “히타치의 결정은 이제 어떤 일본 기업도 일본 밖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에 따르면 히타치는 다른 기업이 건설 프로젝트의 주체를 맡으면 사용되었을 핵 장비 일부를 여전히 매각하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내 업계와 학계에선 이 사안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까.
익명의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16일 <이코리아>와 한 통화에서 “영국이 히타치 원전 계약 전에 프랑스와 계약했던 원전의 전력 단가가 높았다. 그래서 히타치의 프로젝트 전력 단가를 낮게 맺으려고 노력한 걸로 안다”며 “(같은 이유로)히타치 외에 중국과도 교섭이 결렬됐다”고 설명했다.
주목할 점은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의 원전 확대 정책과 맞물려 한전이 히타치가 포기한 영국 원전 사업 참여 논의가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이다. 원전 수출을 통한 국부 창출이란 어젠다도 닮았지만 정부가 적극 지원하고 민간기업이 원전 수출 전사로 나선 점도 닮은 꼴인 것이다.
지난해 9월 부임한 김동철 한전 사장은 한전 창립 후 첫 번째 정치인 출신 사장이다. 정부는 2022년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노후 원전 수명을 연장하고, 신한울 3, 4호기 건설을 재개하며 이른바 ‘탈-탈원전’, ‘친원전 정책’으로 돌아섰다. 또 현재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은 소형모듈원전을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한 핵심산업으로 키워 2030년 전까지 조기 상용화시킨다는 계획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력정책연구센터가 발표한 '영국의 원전 건설과 시사점'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까지 원자력을 활발히 이용하다가 영국 정부의 전력산업 민영화 이후 원전 사업의 경제성이 하락하여 오랫동안 원전 건설이 중단됐다. 그러다가 영국 정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기후변화 대응과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원자력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영국의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과 기술 투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영국 에너지·기후변화부(DECC)는 2015년 11월 원자력을 가스와 함께 미래 에너지안보를 위한 중요에너지원으로 발표했다. 또 원자력 발전을 통해 2030년대까지 30%의 저탄소 전력을 공급하고, 일자리 3만개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 정부와 주요 정당(노동당, 보수당, 자유민주당)은 정권 교체에도 신규 원전 건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이어왔으며, 원자력에 대한 국민 여론도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편이다
2016년 3월 DECC 설문조사(2,105명 대상)에 따르면 38%가 원자력을 지지하며, 23%가 반대, 36%가 중립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원자력이 신뢰 가능한 에너지원이라는 것에 49%가 동의하고 14%가 동의하지 않았다.
영국은 8기의 대형 원전을 추가 건설해 원자력 설비용량을 대폭 늘리고, 원전 확대를 위해 핵연료 기금(NFF), 차세대 원자력 기금(ANF), 미래 원자력 활성화 기금(FNEF)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으로는 핵연료 공급의 안정성을 위해 우라늄 및 관련 제품의 기술을 개발하는 8개 프로젝트에 357억 원을 투자하고, 차세대 원자력 기금으로 3440억 원, 미래 원자력 기금으로 272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영국 정부가 탄소감축을 위해 내건 원전 정책 이후 지난 6년 간 신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거의 계약이 안 됐다”면서 “정부가 내건 정책을 스스로 어기는 꼴이 되다보니 외부에서 경제성을 훼손하면서 원전건설에 진입한다기보다 영국 정부가 사실은 몸이 더 달아서 다른 계약 조건을 내걸 수도 있다”고 전했다.
업계 관계자는 “한전 입장에서는 영국 사업보다는 동유럽 사업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체코, 폴란드 등의 동유럽 국가는 석탄 의존도도 높고, 또 국가안보적인 측면에서도 원전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국에서 원전 사업을 하게 되면 영국 내 국내 인력을 어느 정도 활용해야 하는 요건도 붙고 규제방식도 완전히 다르다”면서 “한전이 영국과 협상을 하게 된 이유는 영국정부 측의 (협상의) 환경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한편, 시장에서는 발표가 가까워진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체코 원전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시점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정혜정 KB증권 연구원은 13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한전기술의 가장 큰 동력은 국내외에서 신규 원전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라고 밝혔다.
정 연구원은 “우선 국내의 경우, 신규 원전 건설계획이 포함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5월 중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해외 원전은 체코 원전과 폴란드 원전 수주를 위한 입찰경쟁 및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체코 원전의 경우 올해 상반기 중으로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될 예정인데, 기존 1~2기에서 3~4기로 규모가 확대된 것에 더해 유력 경쟁자가 한국과 프랑스로 좁혀지면서 수주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윤수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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