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전역에서 소셜 미디어 허위정보로 인해 벌어진 반이민 폭력시위가 8일째 벌어지는 가운데, 영국 정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가짜뉴스가 퍼져나간 경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 폭동은 지난달 29일 영국 중서부 도시 사우스포트에서 발생한 어린이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간 칼부림 사건의 범인이 무슬림 이민자라는 거짓 정보가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잘못된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며 극우 세력을 중심으로 반 무슬림 폭동이 발생했다. 벨파스트, 달링턴, 플리머스 등의 도시에서 5일 밤까지 폭력 시위가 이어졌으며, 난민이 머무르는 시설에 방화를 시도하는 등 폭동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 달 전 총선에서 보수당을 누르고 14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키어 스타머 총리의 노동당 정부는 이번 사태로 시험대에 올랐다. 영국 왕립검찰청에 따르면 6일 기준으로 폭력적인 폭동과 관련하여 약 100여 명이 기소되었다고 밝혔다.
키어 스타머 총리는 “이것은 시위가 아니다.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폭행이며, 우리 거리나 온라인에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또한, 총리는 무슬림에 대한 허위 정보를 확산시킨 소셜 미디어 운영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온라인에서 명백히 조장되는 폭력적인 무질서도 범죄이며, 여러분의 사업장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법은 어디에서나 지켜져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영국 정부는 특히 허위 정보를 빠르게 확산시킨 소셜 미디어에 주목하고 있다. 이베트 쿠퍼 내무부 장관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이 극우 행동을 조장하는 데 '로켓 부스터' 역할을 했다며 소셜 미디어 회사들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국가범죄청과 과학혁신기술부를 중심으로 소셜미디어와 가짜뉴스가 극우 폭력 사태를 어떻게 증폭시켰는지 조사에 돌입으며, 극우 세력 뿐만 아니라 국가 세력의 개입이 있었는지도 조사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이 허위 정보가 퍼져나가는 것을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의 싱크탱크 전략대화연구소에 따르면 정부가 범인의 신원을 발표한 이후에도 소셜 미디어에서 칼부림 사건에 대해 검색하는 사용자에게 잘못 퍼진 범인의 가짜 이름이 추천 검색어로 나왔다는 것이다.
또 소셜 미디어 X(구 트위터)에서는 ‘영국에서 인기있는 트렌드’ 주제를 통해 이용자에게 범인의 허위 정보가 포함된 글을 추천하기도 했다. 소셜미디어 기업들이 허위 정보를 제재하는 대신, 알고리즘을 통해 더 확산시켰다는 지적이다.
한편 영국에는 이미 소셜미디어 기업이 아동 안전을 보호하고 테러 선동과 같은 불법 콘텐츠를 빠르게 삭제하도록 하는 '온라인 안전법'이 제정되어 있지만, 법률의 한계로 인해 소셜 미디어 기업을 처벌하는 것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온라인 안전법은 인터넷 기반 서비스에서 불법적이고 유해한 자료를 단속하기 위해 제정된 영국의 법안으로, 기업이 법안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최대 1,800만 파운드나 연간 매출의 10%를 벌금으로 부과한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거짓 정보로 사용자에게 위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서만 규정하고 있으며, 다수의 군중에게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것을 제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온라인 안전법을 시행하는 오프콤(Ofcom)의 대변인은 영국의 기술 매체 UKTN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오프콤은 해당 법안에 따른 권한이 아직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소셜 미디어 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를 내리기 이전에 세부 규정에 대한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온라인 안전법이 아동 안전이나 테러 선전과 같은 콘텐츠에 대해서는 신속히 삭제하도록 강제하고 있지만, 허위 정보나 외국인 혐오와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또 해당 법은 텔레비전 방송과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를 감독하는 기관인 오프콤(Ofcom)에 온라인 플랫폼을 규제하는 권한을 부여하는데, 그동안 오프콤은 소셜 미디어 허위정보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도 지적했다.
영국의 IT 전문기관 영국 컴퓨터협회는 오프콤이 X에 벌금을 부과하는 등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협회 관계자는 “잘못된 정보가 폭동과 불안으로 이어진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X가 이러한 콘텐츠를 호스팅하면서 공공의 안전을 무시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지 않다.”라며 “우리는 오프콤이 가능한 한 빨리 온라인 안전법을 집행하고, 플랫폼에서 잘못된 관리가 발견되면 상당한 벌금을 부과할 것을 촉구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온라인 안전법의 한계가 드러나며 영국 정부는 별도로 가짜 뉴스에 대한 책임을 소셜미디어에 지우는 법 제정을 별도로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쿠퍼 장관은 “온라인과 소셜 미디어의 허위 정보에 대처하기 위한 더 광범위한 법적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봤다. 독일의 경우 독일 내에서 200만 명 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한 소셜 네트워크 사업자를 대상으로 유해, 불법 콘텐츠를 24시간 안에 삭제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네트워크집행법’(NetzDG)를 지난 2018년 제정했다. 소셜 미디어 기업에게 명백히 불법인 콘텐츠를 신속히 삭제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골자로,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최대 5천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 해당 법안은 독일 내에서 허위 정보와 혐오 발언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지만, 일각에서는 엄격한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EU는 안전한 온라인 환경 조성을 목표로 하는 디지털서비스법 (DSA)을 지난해 발효했다. 해당 법안은 구글, 메타, 애플, 아마존 등 EU 역내 이용자 4,500만 명 이상을 지닌 19개 플랫폼을 ‘대형 온라인 플랫폼’으로 지정해 구글, 메타, 애플, 아마존 등 EU 역내 이용자 4,500만 명 이상을 지닌 19개 플랫폼을 ‘대형 온라인 플랫폼’으로 지정하고 유해한 콘텐츠가 포함된 내용이 게시되는 것을 방지하고 제거하는 동시에 사용자에게 이러한 유형의 콘텐츠를 신고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도록 규정한다. 만약 빅테크 기업들이 디지털서비스법을 위반하게 되면 글로벌 매출의 최대 6%에 달하는 과징금이 부과되며, 반복적으로 위반할 경우 유럽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 ‘통신품위법’으로 알려진 ‘섹션 230’을 통해 인터넷 플랫폼이 사용자들이 생성한 콘텐츠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던 미국에서도 최근 허위정보 확산 방지를 위해 섹션 230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 하마스 계정의 팔로워가 급증하고 하마스를 옹호하는 가짜 계정이 범람하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통신품위법 230조 때문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된 허위정보가 퍼져나가는 것을 방치하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제재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온 바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정치권에서는 온라인 플랫폼이 광고나 유료 콘텐츠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고, 민권법의 집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규정하는 ‘SAFE TECH Act’를 발의하고 섹션 230의 면책 조항을 2025년 12월까지 폐지하는 '일몰' 법안을 논의하는 등 이와 관련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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